김용수 (신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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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인척 = [[비형랑|김비형]](이복 동생) <br /> [[신라 문무왕|문무왕]](적손자) <br /> [[김인문]](적손자) <br /> [[신라 진평왕|진평왕]](사촌 형) <br /> [[국반|진안 갈문왕 김국반]](사촌 형) <br /> [[백반 (신라)|진정 갈문왕 김백반]](사촌 형) <br /> [[흠반공|김흠반]](사촌 형) <br /> [[신라 진흥왕|진흥왕]](할아버지) <br /> [[사도왕후]](할머니) <br /> [[구륜공|김구륜]](숙부) <br /> [[정숙태자]](숙부) <br /> [[신라 선덕여왕|선덕여왕]](5촌 조카딸) <br /> [[신라 진덕여왕|진덕여왕]](5촌 조카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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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춘'''(金龍春,
== 생애 ==
김용춘은 [[진지왕]]과 [[지도부인]](知道夫人) 박씨의 아들로 [[진지왕]]이 [[579년]]에 죽은 뒤에 왕위 계승권에서 멀어졌다.<ref>삼국유사에는 진지왕이 폐위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삼국사기와 차이가 있다.
김용춘은 [[진지왕]]과 [[지도부인]](知道夫人) 박씨의 아들로 [[진지왕]]이 [[579년]]에 폐위되고 죽은 뒤에 왕위 계승권에서 멀어졌다. 용춘의 아들 춘추의 경우 [[진골]]의 신분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용춘의 신분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진지왕]]이 폐위된 후에 성골에서 족강(族降)되었는지, 아니면 성골 신분을 유지하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부인은 [[진평왕]]의 딸인 [[천명공주]]로 [[602년]]에 아들 춘추를 낳았다. [[622년]]([[진평왕]] 44년)에 [[이찬]](伊飡)의 관등에 있었으며, 내성사신(內省私臣)에 임명되었다. [[629년]]에는 대장군이 되어 [[김서현]], [[김유신]]을 부장으로 이끌고 출진, [[낭비성]](娘臂城)을 함락시켰으며, [[635년]]([[선덕여왕]] 4년)에는 주현(州縣)을 돌아보며 위문하였다. [[645년]]에는 황룡사구층목탑 건축을 주관하였고, 이후에는 더 이상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아들 춘추가 왕위에 즉위한 [[654년]]에 [[용춘공|문흥대왕]]으로 추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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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학계에서 [[위서 (문헌학)|위서]]로 의심받고 있는 《[[화랑세기]]》에는 용춘과 용수를 형제로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용춘은 용수의 동생으로, 용수가 요절한 뒤 용수와 결혼한 [[천명공주]]를 다시 맞아들였으며, 용수의 아들인 춘추를 아들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황룡사9층목탑찰주본기’에 따르면 황룡사구층목탑을 건축할 당시인 [[645년]]경까지 용수의 이름이 나타나고 있어 용수가 요절하였다는 《[[화랑세기]]》의 기록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ref>[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2866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황룡사9층목탑찰주본기]</ref> 그리고 《[[화랑세기]]》는 용춘의 일부 행적도 기록하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용춘은 13대 [[풍월주]]를 역임하였으며 [[선덕여왕]]의 부군이 되었으나 자식이 없어 사임하였다고 한다.▼
▲한편 학계에서 [[위서 (문헌학)|위서]]로 의심받고 있는 《[[화랑세기]]》에는 용춘과 용수를 형제로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용춘은 용수의 동생으로, 용수가 요절한 뒤 용수와 결혼한 [[천명공주]]를 다시 맞아들였으며, 용수의 아들인 춘추를 아들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황룡사9층목탑찰주본기’에 따르면 황룡사구층목탑을 건축할 당시인 [[645년]]경까지 용수의 이름이 나타나고 있어 용수가 요절하였다는 《[[화랑세기]]》의 기록과
== 가족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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