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태정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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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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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진종태정제 예순테무르'''(元 晋宗 泰定帝也孫鐵木兒, [[1293년]] [[11월 28일]] ~ [[1328년]] [[8월 15일]]) 또는 '''태정제진종'''(泰定帝晋宗) [[원나라]]의 제6대 황제(재위: [[1323년]] [[10월 4일]] ~ [[1328년]] [[8월 15일]])이다. 시호는 '''흠인대효황제'''(欽仁大孝皇帝)이다. 휘는 '''보르지긴 예순테무르'''({{한자|孛兒只斤也孫鐵木兒 패아지근 야손철목아}}, {{llang|mn|{{mongolUnicode|ᠶᠢᠰᠦᠨᠲᠡᠮᠦᠷ}} Есөнтөмөр}})이다. 예순테무르의 [[묘호]]와 [[시호]]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고, 보통 태정제라 지칭되는 이유는 아들 천순제 [[원 천순제|아라기박]]이 폐위될 당시 그의 시호 역시 추탈되었기 때문이다. 연호를 [[태정 (원)|태정]](泰定)과 [[치화]](致和)로 제정하여 재위 기간에 사용하였다.
 
전통적 유목민으로서의 생활 관습을 중시한 몽골 지상주의자였으며, '군신간에 허물을 이끌어 스스로 책망한 일이 드러나지 않았고, 조종(朝宗)의 법도를 준수하여 천하가 무사했다'는 <원사(元史)>의 평가와는 별개로 시운을 잘 만난 암우(暗愚)한 군주였다는 것이 후세 연구자들의 중평이다.
 
== 생애 ==
세조 [[쿠빌라이 칸]]의 태자황태자 [[친김]](眞金)의 적장자였던 [[카말라 (원나라)|카말라]](甘麻剌)의 차남으로 지원 30년([[1293년]]) 음력 10월, 막북(漠北) 초원의 진왕부(晋王府) 잠저에서 태어났다. 카말라는 친김의 사후 진왕으로 피봉되었으나, [[칭기즈 칸]]의 보훈(寶訓)을 복기하지 못했다는 연유로 배척받아 아우 [[테무르]] 및 [[다르마발라]]와의 후계 경쟁에서 패배한 사연이 있었다. 제위 계승권으로부터 밀려난 카말라는 몽골 고원에 진수(鎭守)해 칭기즈 칸의 오르도와 군마(軍馬)를 관장하면서도 점차 소외당하다가 대덕 6년([[1302년]])에 사망했다. 카말라의 사후 진왕의 작위를 승계했고, 운남(雲南)에 주재한 서형(庶兄)인 양왕(梁王) 송산(松山) 또한 지대 2년([[1309년]])에 사망하면서 예순테무르가 카말라 왕계(王系)의 적통인 동시에 막북파(漠北派)를 대표한 유력 제왕으로 급부상하게 된 것이다.
 
지치 3년([[1323년]]) 8월 4일, [[계촌법|종질]]인 [[시데바라|영종]](英宗)이 [[상도 (지명)|상도]]에서 [[대도]]로 향하던 귀로에 어사대부 테그시(鐵失)에 의해 남파(南坡)에서 피살당했을 때 반란군은 진왕 예순테무르의 옹립을 지지했는데, 여기엔 진왕부 내사(內史)이자 페르시아계 색목인 출신으로 진왕의 측근 총신(寵臣)이었던 다울라트 샤(倒剌沙)가 거사 이틀 전 테그시의 밀사와 접촉하여 교섭을 가진 경위가 배경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9월 4일, 예순테무르는 몽골의 용거하(龍居河, [[케룰렌 강]])에서 대칸으로 즉위했다. 다음 달, 예순테무르는 휘하 군대를 급파하여 대도 조정에 즉위를 알리는 한편 찬탈의 오명을 피하고자 수도에 도착하기 앞서 자신을 옹립해 준 테그시 일당에 대하여 영종 시해의 죄를 물어 숙청 작업을 전개, 주살해 버렸다. 11월 13일, 새 황제가 대도에 입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