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경: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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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4년 [[육진의 난]]이 발생하자 [[갈영]](葛榮)을 따라 활약했으며, 이후 [[하음의 변]]으로 [[북위 (북조)|북위]](北魏)의 [[이주영 (북위)|이주영]](爾朱榮)이 실권을 장악하자 휘하로 들어가 528년 부구(滏口)에서 갈영을 공격할 당시 갈영을 사로잡는 등의 공을 세워 정주자사(定州刺史)에 임명되었다. 이후 북위가 [[동위 (북조)|동위]](東魏)와 [[서위]](西魏)로 분열된 이후에는 동위의 [[고환 (북위)|고환]](高歡)의 밑으로 들어갔으며, [[사도 (관직)|사도]](司徒) 및 하남대행대(河南大行臺)를 더해 하남(河南) 방면의 군사를 지휘하였다. 그 뒤 고환이 사망하자 아들인 [[고징]](高澄)이 후경을 살해하려 하였고, 이에 후경은 반란을 일으켜 서위의 [[우문태]](宇文泰)를 의지하였다. 하지만 반란이 [[한궤]](韓軌)에 의해 토벌되자 547년 [[양 (남조)|양나라]](梁)의 [[양 무제|무제]](武帝)에게로 귀순하였고, 아내 및 장남 후화(侯和) 등이 살해되었다.
 
이후 무제의 후원을 받아 하남왕(河南王) · [[대장군]](大將軍) · 지절(持節)을 제수받았으며, 고징이 [[모용소종]](慕容紹宗)에게 후경의 토벌을 지시하자 정양후(貞陽侯) [[양 민제|소연명]](蕭淵明)과 함께 군대를 이끌었으나 패배하여 소연명은 동위의 포로가 되었다. 그 뒤 양나라와 동위의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어 소연명과 후경의 맞교환이 추진되자 [[후경의 난|반란을 일으켰으며]], 548년 [[왕위 (남북조)|왕위]](王偉)와 [[소정덕]](蕭正德)을 아군으로 끌어들인 뒤 양나라의 수도인 [[건강 (지명)|건강]](建康)을 공격하였다. 이후 건강의 외성이 함락되자 소정덕을 황제로 추대하였고, 549년 건강의 내성까지 함락된 이후 무제가 분사(憤死)하자 후경은 태자였던 [[양 간문제|간문제]]을 옹립하고 소정덕을 폐위시켰다.
 
그 뒤 스스로 [[상국]](相國) · 우주대장군(宇宙大將軍) · 도독육합제군사(都督六合諸軍事)에 올랐으며, 간문제의 딸인 [[율양공주]](溧陽公主)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하지만 간문제가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나 자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551년 간문제를 살해하고 예장왕(豫章王) [[소동]](蕭棟)을 제위에 올렸으며, 후경은 한왕(漢王)을 자칭하였다. 이후 같은 해 소동을 핍박해 [[구석]](九錫)을 누렸으며, 다시 같은 해 [[선양 (역사)|선양]](禪讓)을 받고 제위에 올라 국호를 [[한]](漢)이라고 하고 연호를 [[태시]](太始)로 정해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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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이후 후경의 유해는 갈기갈기 찢기고, 목은 강릉(江陵)의 성문에 걸렸으며, 왕승변이 후경의 두 팔과 두 다리를 잘라 [[북제]](北齊)의 [[북제 문선제|문선제]](文宣帝)에게 보냈다. 또한 후경의 시체는 는 건강 시장 바닥에 버려졌으며, 건강의 서민들은 후경의 시체를 회로 떠 먹었다.
 
== 같이 보기 ==
* [[후경의 난]]
 
{{중국 남조의 황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