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량 (동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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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325년 사마소가 세상을 떠나자 [[왕도 (동진)|왕도]](王導)와 함께 유언을 받들어 [[동진 성제|사마연]](司馬衍)을 보좌했으며, 중서령(中書令)에 올랐다. 하지만 사마소의 사후 공신들의 논공행상 당시 [[조약 (동진)|조약]](祖約)의 원한을 사게 되었으며, 왕돈의 반란을 평정한 공을 세운 [[소준]](蘇峻)을 제거하기 위해 건강으로 부르려다 계획이 발각되어 소준은 조약과 연합한 뒤 [[소준의 난]]을 일으켰다. 유량은 반란군에게 패배해 동생인 [[유익]](庾翼) 등과 함께 석두성(石頭城)에서 탈출해 평남장군(平南將軍) · 강주자사(江州刺史)인 [[온교]](溫嶠)를 의지했으며, 온교의 조언으로 무창(武昌)에서 주둔하던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 형주자사(荊州刺史) [[도간]](陶侃)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도간은 아들 도첨(陶瞻)이 소준에게 살해당한 것을 명분으로 유량과 협력하였으며, 소준이 거주하는 석두성을 공격해 329년 반란이 평정되었다.
그 뒤 [[후조]](後趙)의 [[석륵]](石勒)이 사망하자 주둔지를 양양(襄陽)으로 옮겨 북벌을 꾀하였으나, 339년 북벌의 거점 역할을 하던 주성(邾城)이 후조의 [[석호]](石虎)에 의해 함락되면서 무산되었고 유량은 이에 책임을 지고 스스로를 안서장군(安西將軍)으로 강등시켰다. 같은 해 왕도가 사망하자 조정에서 유량을 [[사도 (관직)|사도]](司徒) · 양주자사(揚州刺史) · 녹상서사(錄尙書事)로 임명해 수도로 불러들이려 하였으나 유량은 이를 사양하였고, 이듬 해인 340년 사망하였다. 사후 [[태위]](太尉)로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강공(文康公)이다. 서부군단은 동생인 유익이 물려받았으며, 345년 유익의 사망 이후 [[환온]](桓溫)이 이를 계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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