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락제: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력사 (토론 | 기여)
→‎당새아의 반란: 오타를 고침
태그: m 모바일 앱 안드로이드 앱 편집
102번째 줄:
[[1420년]](영락 18년) [[2월]] [[청주]] 포대현(蒲臺縣) 출신 [[당새아]](唐賽兒)라는 여성이 당시 중국 각지 농민층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던 [[백련교]](白蓮敎)라는 종교단체를 근간으로 하여 청주에서 반란을 선언했다. [[명나라]]의 평민 농부인 임삼(林三)의 아내였던 [[당새아]]는 어릴 때부터 불경(佛經)을 외웠는데 나중에는 스스로를 불모(佛母)라고 자칭하였고 [[백련교]]도가 되었는데 그의 설법에 많은 사람들이 설복하였다.
 
[[1420년]]에는 이들과 백련교도들을 기반으로 1419년 겨울부터 익도(益都)를 점령, 영락제의 실정을 비판하고 그를 폭군이라 규탄했다. 당새아가 이끄는 반란군은 [[난징]]과 [[짱수 성강소성]], [[산둥 성산동성]] 주변 점령하고 산둥 지방을 중심으로 맹위를 떨쳤다. 영락제는 즉시 진압명령을 내렸으나 관군들은 번번이 패전, 부상당하거나 사상자들만 내던 중 그해 겨우 반란을 가라앉혔다.
 
나중에 당새아는 체포되어 목과 손발에 형구를 씌우고 굵은 철사로 묶어 놓았는데, 매복한 당새아의 잔당이 그녀를 탈옥시켰다. 이에 시중에는 [[당새아]]가 요술(妖術)을 부려 모두 벗어 던지고 달아났다는 전설이 나오게 되었다. 화가 난 영락제는 "삭발하고 중이 되었거나 여도사(女道士) 무리에 당새아가 숨어 있을지 모르니 산둥과 난징, 베이징의 비구니들과 출가한 부녀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이라"는 조칙을 내렸다. [[명나라]] 각지에서 수 만명의 비구니 여승과 여도사들이 잡혀왔으나 결국 당새아는 잡지 못했다. 이는 그의 만년 치세에 큰 타격을 주었고, 이는 민중들 사이에 회자화되어 민담과 전설의 소재가 되었다. 후일 [[청나라]] 때의 [[백련교도의 난]]은 [[당새아의 난]]과 [[홍건적의 난]]을 참고하였으며, [[청나라]] 때의 작가 [[여능]](呂能)은 [[당새아]]의 반란을 소재로 하여 소설 '여선외사'(女仙外史)를 쓰기도 했다. [[당새아의 난]]은 [[조선]]에도 알려져 [[인조실록]] 등에도 고사로 소개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