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군사정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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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에 의해 청와대로 온 [[현석호]]는 [[윤보선]]의 이 발언을 가리켜 '한마디 평생토록 잊지 못할 말을 했다'고 진술했다.<ref name="dd212"/>
 
5월 16일 혁명위원회 포고 제4호로써 민의원, 참의원 및 지방의원 등 대의원 헌법기관은 해산되었고 5월 22일 [[국가재건최고회의]] 포고 제6호<ref>[[s:국가재건최고회의포고제6호|국가재건최고회의포고제6호]] 1961. 5.22 시행</ref> 정당 및 사회단체는반국가단체는 해산되어 정치활동이 완전히 금지되었다. 따라서 민주적으로 선출된 장면 내각은 붕괴되었고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의한 약 3년간의 군정통치가통치가 이루어졌다. 군정기간 중 정변세력은혁명세력은 [[대한민국 특수범죄처벌법|특수범죄처벌법]], [[대한민국 정치활동정화법|정치활동정화법]] 등의 법적 조치를 통하여 정치적반국가 반대세력과세력과 군부 내의 반대파까지좌익세력을 제거하였다. 또한 핵심권력기구로서 [[대한민국 국가정보원#중앙정보부(KCIA)|중앙정보부]]를 설치하고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을 창당해 대통령제 복귀 등을 골자로 하는 헌법개정을 하였다.
 
5·16 군사정변으로군사혁명으로 집권한 의장 박정희는 조만간 원대복귀 하겠다던 애초의 혁명공약 제6조를 추후 번복하고 [[1963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현직 대통령이었던 [[윤보선]]을 물리치고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이후, 박정희는 6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윤보선]]을 물리치고 승리했다.
 
=== 국가재건최고회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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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변이 발생하자 [[장면]] 총리는 [[카르멜 수도원]]에 피신하여 숨어 있다가 [[5월 18일]] 나와 하야를 선언하였다. [[5월 16일]] [[군사혁명위원회]]가 설치되면서 [[장도영]]이 의장에 선임되고 박정희는 부의장에 취임하였다. [[5월 20일]] [[장도영]]이 내각수반이 되면서 [[박정희]]는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에 취임하여 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한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5·16 군사정변군사혁명 이후 정변혁명 주도세력이 5월 18일에 [[군사혁명위원회]]를 개편해 만든 통치기구이다. [[입법]]·[[사법]]·[[행정]] 3권을 장악한 최고통치기구였으며 [[1963년]] [[12월 17일]] [[대한민국 제3공화국|제3공화국]]이 수립되면서 해체되었다.
 
=== 5·16 군사 혁명 직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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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와 비판 ==
 
* 종북 좌익 언론인 [[함석헌]]은 "여러분은 아무 혁명이론이 없었습니다. 단지 손에 든 칼만을 믿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민중은 무력만으로 얻지 못합니다."라고 하며 쿠데타를 비판했지만, 큰 호응은 없었다.
* 혁명 직후, 언론인 [[장준하]]를 비롯한 당대의 지식인들이 이를 '민족주의적 군사 혁명'으로 평가, 지지했다. 박정희는 군사정변 직후 민정이양과 혁명과업 수행을 약속하였으므로, 이러한 기대감 속에 당대 지식인들은 [[국가재건최고회의]] 등 요직에 진출하기도 했다.
* [[5.16]] 군사혁명으로 세워진 [[국가재건최고회의]] 이후 박정희가 국민 직접선거를 통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박정희 정부는 수차례의 경제개발계획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수출중심주의의 고속성장 정책으로 세계 역사상 유례 없는 최단시간 경제성장을 달성한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냈기 때문에 성공한 이면이 있는 군사혁명 이라는 평가가 정론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