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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1502년]](연산군 8) [[전라남도]] [[광산군]] 압촌마을(현, [[광주광역시]] [[동구 (광주광역시)|동구]] [[압촌동]])에서 태어났으나 생일은 미상이다. 증조부는 행충좌위부사직을 지내고 사후 증 통훈대부 통례원좌통례(贈通訓大夫通禮院左通禮)에 추증된 고상지(高尙志)이고 할아버지는 증 통정대부 공조참의(贈通政大夫工曹參議諱)에 추증된 고자검(高自儉)이며 아버지는 승의랑, 형조좌랑 겸 춘추관기주관을 지내고 사후 증 가선대부 예조참판겸 동지의금부사(贈嘉善大夫禮曹參判兼同知春秋館事)에 추증된 고운이다. 아버지 고운은 [[조광조]]와 친했다는 이유로 [[1519년]] 관직을 잃고 내려와 고향에서 여생을 보냈다. 어머니는 광산이씨(光山李氏)로 이호선(李好善)의 딸이다. 아버지 고운은 그림도 잘 그렸는데 동문선에도 수록되었고, 남화풍의 맹호도를 잘 그렸으며, 백액대호도 등이 현전한다.
 
그의 선대는 [[전라남도]] [[영광군 (전라남도)|영광군]]에 살았지만 아버지 고자검의 대에 영광에서 [[광산군]] 압촌마을로 이주해 왔다.
 
생원(生員)에 합격하고 그 뒤 늦게 [[1540년]](중종 35년) [[과거 제도|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봉렬대부(奉列大夫) 행 예조정랑(行禮曹正郞)으로 [[춘추관]]기주관(記注官)을 겸하여 [[중종실록]]의 편수에 참여하였다. 이후 홍문관(弘文館)에 올랐고, 1546년(명종 1) 예조좌랑이 되었다. 이듬해 [[7월]]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이 된 뒤, [[1550년]] [[5월]]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이 되었으며 이때 양사에서 [[진복창]] 일파를 논죄할 때 구수담·송순·허자·이준경·이윤경 등을 함께 죄인을 두둔했다며 공격하였으며 7월까지 계속 구수담 등을 논핵하였다. 다음해 10월 28일 특지(特旨)로 옥천군수(沃川郡守)에 발령되었다. 이후 [[관찰사]] 이몽량(李夢亮) 등의 보고가 임금에게 전달되어, 1553년 10월 23일 지방관을 시상할 때 폐단을 제거하고 선정을 베풀었다 하여 왕으로부터 포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