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 은봉종택과 대계서원 고문서 일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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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문강공 은봉(隱峰) [[안방준 (1573년)|안방준]](安邦俊, 1573~1654)은 호남을 대표하는 유학자이다. 20세에 [[임진왜란]]을 당해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55584&cid=46622&categoryId=46622 박광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에도 격문을 띄워 근왕(勤王)의 의기(義旗)를 높이 세웠다.


[[임진왜란|임진]]․[[정유재란|정유왜란]]과 관련된 「진주서사(晋州敍事)」, 「삼원기사(三寃記事)」, 「호남의록(湖南義錄)」, 「임진기사(壬辰記事)」, 사림정신을 고취한 「기묘유적(己卯遺蹟)』, 「항의신편(抗義新編)』, 동서 분당과 관련된 「혼정편록(混定編錄)』, 「기축기사(己丑記事)」 등의 저술을 남겨 절의정신을 고무시키고 배운 것을 올바르게 실천하는 참된 선비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ref name="전라남도 고시 제2009 - 50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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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독류(4책)는 안방준과 교유한 명현들의 편지를 엮어놓은 첩본(諸賢簡牘), 은봉과 그의 아들, 손자, 증손자들과 교유한 명현들의 편지(先儒往復[諸賢簡牘]), 은봉과 인척을 맺었던 성문준(成文濬, 우계 [[성혼]]成渾의 아들) 집안의 편지와 은봉 자신과 후손들의 편지(內外先祖手蹟), 고종 원년(1864)에 대계서원에서 『은봉전서』를 간행 배포할 때 받은 답장 편지(簡牘) 등이다. 당대 학자들의 교유 관계, 조선조의 정치상황, 선비들의 출처관(出處觀), 친인척 간의 교유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며, 서예사적 가치도 있다.<ref name="전라남도 고시 제2009 - 503호" />
 
 
대계서원 관련 문서는 대계서원진신장의안(大溪書院搢紳掌議案) 등 조선후기의 기록자료로서 사액서원의 운영현황을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라는 점과 조선 후기 사회의 한 면모를 파악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라는 점에서 학술적 의의가 크다. 가치가 있다.<ref name="전라남도 고시 제2009 - 503호" />
 
 
 
고문서 가운데 교지류는 안방준(安邦俊) - 안후지(安厚之) - 안전(安峑) - 안두상(安斗相) 등 4대에 걸친 차첩, 교첩, 유지, 교지 등으로 당시 제도를 알 수 있는 자료이다. 명문류는 1600년대 후반에서 등 1800년대 후반에 이르는 문서로서 매매관행과 제도를 알 있는 고문서이다. 소지류는 『은봉전서』간행과 관련하여 문파(門派) 간의 분쟁을 조정하기 위한 문서와 산송(山訟)이나 계(契), 위선(爲先) 사업과 관련된 문서들이다. 이 문서들은 조선조 후기에 한 종가의 역사와 생활세계를 알 수 있는 자료이다.<ref name="전라남도 고시 제2009 - 503호" />
 
 
보성의 은봉 안방준 종가와 대계서원에 소장된 고문서는 선현의 간찰, 대계서원 문서, 안방준과 그 후손관 관련되는 교지류와 호적문서, 그리고 명문류와 소지류 등이다. 이들 문서는 조선조의 정치상황, 선비들의 출처관(出處觀), 친인척 간의 교유, 인물교류사, 사액서원의 운영, 종가를 중심으로 한 생활사 등 조선후기 제도사와 향촌사회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로서 역사적, 학술적 가치도 있다. 또한 간독류는 예술적 가치도 있다. 따라서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할 가치를 지닌다.<ref name="전라남도 고시 제2009 - 503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