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경수 (야구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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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중앙일보|날짜=2002-02-25|확인날짜=2018-12-19|깨진링크=아니오}}</ref> 3학년 때인 [[1991년]]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1년 후배 좌완 투수 [[김영수 (1975년)|김영수]]와 함께 경기고를 사상 처음 전국 4강에 올려놓는 쾌거를 이루었다.
 
1991년 당시 [[공주고]] [[박찬호]], [[대전고]] [[정민철]], [[경남상고]] [[차명주]], [[부산고]] [[염종석]], [[광주일고]] [[박재홍]], [[대구상고]] [[전병호]] 등 소위 '92학번' 전국구 스타 투수들이 대거 등장하였는데 그 틈바구니 속에서 [[휘문고]] 임선동, [[신일고]] 조성민과 함께 트로이카 체제를 구축하며 프로와 대학 스카우트들에게 큰 주목을 받았다. 세 명 모두 서울지역 연고권을 갖고 있는 LG와 OB의 스카우트 대상이 되어 선수들을 둘러싸고 이 두 팀간에 사전계약이 난무하는 '억대 스카우트 파문'이 크게 일었다. [[1992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1992년 프로 신인 드래프트]]에서 임선동에 이어 1차 2순위로 [[OB 베어스]]에 지명되어 계약이 유력시 되었으나, 계약금 5억의 요구조건을 좁히지 못해 협상이 결렬되어 반대급부로 계약금과 장학금을 동시에 제시한 [[홍익대학교]]로 진로를 변경했다급선회했다.
 
홍익대 1학년 때인 [[1992년]] 6월 '92학번 동기' 임선동, 조성민, 전병호, 차명주와 함께 대학 대표팀에 선발되어 7월 [[미국]]에서 열린 제4회 한미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하였다. [[제이슨 지암비]], [[노마 가르시아파라]], [[제이슨 베리텍]], [[찰스 존슨]] 등 [[메이저 리그]] 예비 슈퍼스타들로 구성된 미국 타선에 맞서 1차전 4회말 선발 [[신재웅]]에 이어 구원 등판하여 2.1이닝 6피안타 3실점하였으며 3차전에서는 8회말 구원 등판하여 1이닝 2피안타 1실점을 기록하였다.
 
2학년 때인 [[1993년]]에도 [[인터콘티넨털컵 (야구)|대륙간컵]], [[유니버시아드 야구|유니버시아드]] 국가대표로 거론되었지만 간염 증세로 인해 경기력이 급격히 저하되기 시작하였고, 어려운 가정사와 연이은 숙소 이탈 문제까지 겹치면서 학교 측과 갈등의 골이 점점 깊어졌다. 결국 홍익대에아버지의 교통사고로 인한 생계곤란을 이유로 홍익대에 자퇴서를 제출하고 프로 지명팀 OB 베어스 입단을 시도하지만, 홍익대는 불성실한 선수 생활을 거론하며 자퇴서를 수리하지 않았다. '불미스러운 일로 대학을 중퇴한 선수는 2년간 프로 등록 불가'의 규정이 존재했지만, 2년 징계 해제 시점과 홍익대 졸업 시점이 1996년으로 동일하다는 OB측의 계산 하에 1993년 12월 계약금 7,800만 원, 연봉 1,200만 원에 입단 계약을 체결하고 다음날 선수 등록을 완료하였다.<ref>{{뉴스 인용|저자=|제목=김용국.윤용하 태평양行/손경수,OB 입단계약|url=https://news.joins.com/article/882722
|뉴스=중앙일보|날짜=1993-12-28|확인날짜=2018-12-19|깨진링크=아니오}}</ref>
 
그러나 잦은 음주로 인해 간염 증세가 악화된데다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음주와 훈련 이탈의 악순환이 반복됐다. 결국 1군 마운드에 단 한 번도 오르지 못한 채 [[1995년]] 말 임의탈퇴 처리되어 팀을 떠났다. 이후 다시 두산 팀에 테스트 요청을 하였지만 끝내 합류하지 못하고 영원히 야구계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