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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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토벤과의 만남 ===
또한 모차르트는 베토벤이[[오스트리아]] [[빈]]에서 [[생활]]하던 [[1784년]]에 [[루트비히 판 베토벤]]과도 만났다. 그는 어려운 집안사정에도 자신을 찾아온 [[베토벤]]을 반갑게 맞이하였는데, 이 때 [[베토벤]]의 나이는 불과 14세였다. 모차르트는 [[베토벤]]이 자신의 곡을 즉흥적으로 또다른다른 작품으로 훌륭히 소화하자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교육비를 일절 거절하고, 베토벤을[[베토벤]]을 가르치는데 전념했다. 그러나 베토벤은[[베토벤]]은 어머니가[[어머니]]가 사망하였다는[[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모차르트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빈을[[오스트리아]] [[빈]]을 갑작스럽게 떠났다. 만난 지 불과 1달만의 일로 이것이 두 거장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베토벤이[[베토벤]]이 다시 [[빈]]에 찾아온 건 [[1792년]]으로 그때는그 때는 모차르트가 죽은지 1년이 지난 뒤다후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전거는 [[오토 얀]]이 저술한 모차르트의 전기가 유일하다. 따라서 오늘날은 베토벤과[[베토벤]]과 모차르트가 만났다는 일화에 대한 신뢰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또한 모차르트는 [[빈]]에서 생활하던 [[1784년]]에 [[루트비히 판 베토벤]]과도 만났다. 그는 어려운 집안사정에도 자신을 찾아온 베토벤을 반갑게 맞이하였는데, 이때 베토벤의 나이는 불과 14세였다.
 
모차르트는 베토벤이 자신의 곡을 즉흥적으로 또다른 작품으로 훌륭히 소화하자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교육비를 일절 거절하고 베토벤을 가르치는데 전념했다. 그러나 베토벤은 어머니가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모차르트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빈을 갑작스럽게 떠났다. 만난 지 불과 1달만의 일로 이것이 두 거장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베토벤이 다시 [[빈]]에 찾아온 건 [[1792년]]으로 그때는 모차르트가 죽은지 1년이 지난 뒤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전거는 [[오토 얀]]이 저술한 모차르트의 전기가 유일하다. 따라서 오늘날은 베토벤과 모차르트가 만났다는 일화에 대한 신뢰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 죽음 ==
[[파일:Croce-Mozart-Detail.jpg|섬네일|모차르트의 초상화. Johann Nepomuk della Croce의 1780년 경 작품.]]
모차르트의 죽음과 그 원인에 대해서는 수많은 전설을 비롯하여 학설이 많다. 낭만적인 주장으로는 모차르트의 [[건강]]이 점점 약해지면서 그의 모습과 [[작품]] 역시 다가오는 [[죽음]]과 함께 쇠퇴하였다는 것이 있다. 반면에 다른 학자들은 모차르트의 마지막 해가 그에게 성공적이었으며, 그의 [[죽음]]이 가족들에게 충격이었다는 점을 들어 그의 [[죽음]]이 급작스러웠다고 주장한다. 그의 [[죽음]]의 원인 또한 추측이 무성하다. 기록에는 그가 "무수히 난 좁쌀만한 발열"("hitziges Frieselfieber")로 죽었다고 되어 있는데, [[현대의학]]으로 [[진단]]할 수 있는 것에 비해서는 충분한 정보가 되지 못하고 있다. 사인에 대한 학설 중에는 [[선모충병]], [[중독]], [[류머티스열]], 덜 익힌 돼지고기에 의한 [[식중독]] 등이 있다. [[환자]]의 [[혈액|피]]를 뽑았던 당시의 [[의술]]도 모차르트의 [[죽음]]을 앞당기는 데에 이바지했다고 본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1791년]] [[12월 5일]] 오전 0시 55분경에 죽었다. 콘스탄체는 모차르트가 완성하지 못한 [[작품]] [[레퀴엠 (모차르트)|레퀴엠]]의 완성을 여러 제자에게 맡겼으나 끝내 완성하지 못하다가 결국 프란츠 크사버 쥐스마이어(Franz Xaver Süssmayr)가 완성했다. 모차르트가 [[가난]]과 [[무관심]] 속에서 죽었다는 [[이야기]]와 다르게 그는 나름 만족할 만한 수입이 있었고, [[체코]] [[프라하]] 같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 꾸준한 작곡 의뢰를 받았다. 그가 말년에 전성기 때만큼의 명성을 누리지는 못했으며 [[돈]]을 꿔 달라고 쓴 [[편지]]가 있지만, 이는 그가 [[가난]]해서가 아니라 번 [[돈]]보다 더 많이 썼기 때문이었다. 그 실례로 모차르트가 입은 [[옷]]은 [[보석]]으로 장식된 화려한 [[의상]]이었다. 모차르트는 빈 외곽의 [[성 (건축)|성]], 마르크스 묘지에 묻혔다. New Groove에 따르면 그가 여러 사람과 함께 묻힌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가난]]해서가 아니라 당시 [[오스트리아]] [[빈]] [[중산층]]의 장례 풍습대로였다. 그것은 잘 정비된 묘지였으며 [[나무]]로 된 것이었으나 [[묘비]]도 있었다. [[묘비]]가 [[나무]]였던 것 또한 당시 [[오스트리아]] [[빈]] [[중산층]]의 장례 풍습에 따른 것이었다. 실제 당시 [[오스트리아]] [[빈]]에서는 화려한 장례가 엄격히 금지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장례식 날 [[비 (날씨)|비]]가 오고, [[천둥]]이 쳤다고 하나 New Groove에 따르면 사실은 [[구름]] 한 점 없는 쾌청한 날이었다고 한다. 현재 모차르트의 [[무덤]]의 위치를 알 수 없는 것은 성 마르크스 묘지가 더 많은 [[묘지]]를 수용하기 위해 이장을 거듭하였기 때문이지 아무렇게나 묻었기 때문은 아니다. 콘스탄체 모차르트는 [[남편]]이 죽은 후 추모 음악회, 미발표 작품의 출판 등으로 [[경제적]]으로 성공하였다. [[1809년]] 그녀는 덴마크 출신 [[외교관]]이었던 게오르크 니콜라우스 폰 니센(Georg Nikolaus von Nissen)과 재혼했다. 그들은 [[덴마크]]로 [[인구이동|이주]]했다가 다시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로 돌아와 여생을 마감했다. 콘스탄체와 새 남편은 모두 모차르트에 대한 전기를 남겼다.
 
모차르트의 죽음과 그 원인에 대해서는 수많은 전설을 비롯하여 학설이 많다. 낭만적인 주장으로는 모차르트의 건강이 점점 약해지면서 그의 모습과 작품 역시 다가오는 죽음과 함께 쇠퇴하였다는 것이 있다. 반면에 다른 학자들은 모차르트의 마지막 해가 그에게 성공적이었으며, 그의 죽음이 가족들에게 충격이었다는 점을 들어 그의 죽음이 급작스러웠다고 주장한다.
 
그의 죽음의 원인 또한 추측이 무성하다. 기록에는 그가 "무수히 난 좁쌀만한 발열"("hitziges Frieselfieber")로 죽었다고 되어 있는데, 현대 의학으로 진단할 수 있는 것에 비해서는 충분한 정보가 되지 못하고 있다. 사인에 대한 학설 중에는 [[선모충병]], 중독, [[류머티스열]], 덜 익힌 돼지고기에 의한 [[식중독]] 등이 있다. 환자의 피를 뽑았던 당시의 의술도 모차르트의 죽음을 앞당기는 데에 이바지했다고 본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1791년]] 12월 5일 오전 0시 55분경에 죽었다. 콘스탄체는 모차르트가 완성하지 못한 작품 [[레퀴엠 (모차르트)|레퀴엠]]의 완성을 여러 제자에게 맡겼으나 끝내 완성하지 못하다가 결국 프란츠 크사버 쥐스마이어(Franz Xaver Süssmayr)가 완성했다.
 
모차르트가 가난과 무관심 속에서 죽었다는 이야기와 다르게 그는 나름 만족할 만한 수입이 있었고 [[프라하]]같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 꾸준한 작곡 의뢰를 받았다. 그가 말년에 전성기 때만큼의 명성을 누리지는 못했으며 돈을 꿔 달라고 쓴 편지가 있지만, 이는 그가 가난해서가 아니라 번 돈보다 더 많이 썼기 때문이었다. 그 실례로 모차르트가 입은 옷은 [[보석]]으로 장식된 화려한 의상이었다. 모차르트는 빈 외곽의 성, 마르크스 묘지에 묻혔다. New Groove에 따르면 그가 여러 사람과 함께 묻힌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가난해서가 아니라 당시 빈 중산층의 장례 풍습대로였다. 그것은 잘 정비된 묘지였으며 나무로 된 것이었으나 묘비도 있었다. 묘비가 나무였던 것 또한 당시 빈 중산층의 장례 풍습에 따른 것이었다. 실제 당시 빈에서는 화려한 장례가 엄격히 금지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장례식 날 비가 오고 천둥이 쳤다고 하나 New Groove에 따르면 사실은 구름 한 점 없는 쾌청한 날이었다고 한다. 현재 모차르트의 무덤의 위치를 알 수 없는 것은 성 마르크스 묘지가 더 많은 묘지를 수용하기 위해 이장을 거듭하였기 때문이지 아무렇게나 묻었기 때문은 아니다.
 
[[콘스탄체 모차르트]]는 남편이 죽은 후 추모 음악회, 미발표 작품의 출판 등으로 경제적으로 성공하였다. [[1809년]] 그녀는 덴마크 출신 외교관이었던 게오르크 니콜라우스 폰 니센(Georg Nikolaus von Nissen)과 재혼했다. 그들은 덴마크로 이주했다가 다시 잘츠부르크로 돌아와 여생을 마감했다. 콘스탄체와 새 남편은 모두 모차르트에 대한 전기를 남겼다.
 
== 음악 ==
{{본문|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작품 목록}}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년|1756]]-~[[1791년|1791]])는 여러 장르의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의 많은 작품 가운데 특히 [[오페라]], [[피아노 협주곡]], [[교향곡]], 그리고 [[현악 사중주]]와 [[현악 오중주]] 작품들이 유명하다. 모차르트는 또 피아노 솔로와, 여러 형태의 [[실내악]], [[미사곡]] 및 여러 종교 음악, 무곡들, [[디베르티멘토]] 등도 작곡했다.
 
* "K." 쾨헬 번호/교향곡(1번-41번), 피아노 협주곡(1번-27번, 일부 초기 작품은 제외
 
=== 교향곡 ===
모차르트는 [[1764년]]부터 [[1788년]]까지 24년의 기간 동안 여러 교향곡을 작곡했다. 가장 최근의 조사에 따르면, 모차르트는 전통적으로 알려진 41개보다 훨씬 많은 총 68곡의 완전한 교향곡을 작곡했다. 그러나 관습적으로 마지막 세 교향곡이라고 하면 교향곡 번호 39번, 40번과 41번을 지칭한다. 일부 교향곡(K. 297, 385, 550)은 초판 이후 모차르트에 의해 수정되기도 했다. 이탈리아 서곡 형식(세악장:알레그로-안단테-알레그로) 일부만 미뉴에트 포함
 
이탈리아 서곡 형식(세악장:알레그로-안단테-알레그로) 일부만 미뉴에트 포함
 
* 교향곡 1번 E flat 장조, K.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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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츠부르크 시기의 교향곡 (1772년-1781년) ====
이 교향곡들은 보통 "초기"(1772년-1773년)나 "후기"(1773년-1775년)교향곡으로 나뉘거나, 가끔은 "독일식"(미뉴에트를 포함) 또는 "이탈리아식"(미뉴에트 없음)으로 나뉜다. 이 곡들은 모차르트의 생전에 출판된 적이 없다. 이탈리아 서곡 형식의 세 개의 악장으로 되어 있는 [[디베르티멘토]] 세 작품(K. 136-138)들은 비록 "교향곡"은 아니지만 "잘츠부르크 교향곡"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탈리아 서곡 형식의 세 개의 악장으로 되어 있는 [[디베르티멘토]] 세 작품(K. 136-138)들은 비록 "교향곡"은 아니지만 "잘츠부르크 교향곡"으로 불리기도 한다.
 
* [[교향곡 15번 (모차르트)|교향곡 15번]] G 장조, K. 124 (177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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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네이버캐스트
|확인날짜=2014-06-24}}</ref> 다만, 당시에는 [[프리메이슨]]에 가입한다는 것이 가입자 자신의 사회적 영향력에 대한 과시의 의미가 컸으므로, 친목 단체인 프리메이슨의 특성상 그리 문제될 일은 아니었다.
 
== 작곡가 모차르트를 주제 또는 소재로 한 작품 ==
* [[모짜르트 (뮤지컬)|뮤지컬 모차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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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거 통제}}
{{기본정렬:모차르트, 볼프강 아마데우스}}
== 각주 ==
{{각주}}
 
{{위대한 독일인}}
{{전거 통제}}
{{기본정렬: 모차르트, 볼프강 아마데우스}}
== 각주 ==
 
<references/>
[[분류: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분류:1756년 태어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