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연군: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TedBot (토론 | 기여)
잔글 봇: 미사용 변수 제거
편집 요약 없음
태그: m 모바일 웹
41번째 줄:
{{인용문2|부교리 임안철(林顔喆)의 논계(論啓)로 인하여 남연군궁(南延君宮)의 하속(下屬)이 간사한 짓을 하고 공갈 협박하여 평민에게 해를 끼친 정상을 거듭 조사한즉, 장삼철(張三哲)·최치성(崔致聖) 두 사람이 문하에 출입하여 도서 문적(圖書文蹟)을 청촉하여 만들어 내고, 타인의 채권을 궁전(宮田)이라 핑계대어, 지평(砥平)에 사는 고성인(高姓人)에게 전화(錢貨)를 강제로 수봉(收捧)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청컨대 성상께서 재결하소서.<ref name="jangsam">순조 22권, 19년(1819 기묘 / 청 가경(嘉慶) 24년) 12월 9일(정유) 1번째기사, 형조에서 남연군궁 하속의 간사한 짓을 조사한 것을 아뢰다</ref>}}
 
순조는 '나이 어리고 마음이 약해서 남의 꾐에 빠져 이와 같은 패려궂은 짓을 하였으니, 매우 놀랍다. 그 죄상을 논한다면 유방(流放)하여도 오히려 헐하다 하겠으나, 그 노모를 생각 하여생각하여 우선 보류하라. 남연군(南延君) 구(球)에게 삭판의 율을 시행하여 허물을 뉘우치고 몸을 신칙하게 하며, 잡인과 접촉 못하게 하고 궁속을 단속하여 개과 천선을 도모(圖謀)하도록 하라.'며 가볍게 견책하고 직책을 박탈하는 선에서 사건을 종결지었다.<ref name="jangsam"/> 그러나 1년만에 그는 다시 복직되었다. [[1820년]]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임명되고 같은 해에 [[숭헌대부]]로 승진했다. [[1820년]](순조 20) [[7월 21일]] [[의녀]]를 잡아다가 종아리를 후려쳤다가 [[송상렴]](宋祥濂)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가 [[7월 25일]] 서용의 명을 받았다. [[1820년]] [[9월 7일]] 도총관에 임명되었다가 9월 11일 개차되었지만 다시 9월 18일에 도총관으로 복직되었다.
 
[[1821년]] [[1월 1일]] 가덕대부가 되고 이후 수릉관, 재궁상면상자서사관(梓宮上面上字書寫官) 등을 지냈다. [[1822년]](순조 22) [[3월 12일]] [[가덕대부]]가 되었다. 그해 [[3월 22일]] 생가의 아버지 이병원이 나이 71세가 되었음을 들어, 몽은(蒙恩, 노인에게 은전을 베푸는 것)을 상언하여 순조에게 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