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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 정보
|이름=류자광(柳子光)
|생애= [[1439년]]<ref name=a>『국조문과방목』</ref> ~ [[1512년]]
|별명= 자는자(字)는 우복우후(于後)<ref 또는 우천name=a/>, 작위는 무령군, 무령부원군
|태어난 곳= [[조선]] [[전라남도]] [[영광군 (전라남도)|영광군]]
|죽은 곳= [[조선]] [[경상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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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자광'''(柳子光, [[1439년]]<ref name=a/> ~ [[1512년]] [[6월]])은 [[조선]]의 초기의 무신, 군인, 교육자, 유학자, 작가이다. 본관은 [[영광 류씨|영광]](靈光), 자(字)는 우복우후(于)<ref>[http://people.aks.ac.kr/front/dirservice/dirFrameSet.jsp?pUrl=/front/dirservice/ppl/viewDocumentPpl.jsp?pLevel2Name=&pLevel3Name=&pAgeCode=&pAgeName=&pGanadaFrom=&pRecordID=PPL_6JOa_A9999_1_0008206&pPplCount=&pOrderByType=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깨진 링크|urlname=http:a//people.aks.ac.kr/front/dirservice/dirFrameSet.jsp?pUrl=%2Ffront%2Fdirservice%2Fppl%2FviewDocumentPpl.jsp%3FpLevel2Name%3D&pLevel3Name=&pAgeCode=&pAgeName=&pGanadaFrom=&pRecordID=PPL_6JOa_A9999_1_0008206&pPplCount=&pOrderByType= }}</ref>, 우천(宇天)이다. [[1467년]] [[이시애의 난]]의 토벌에 참여하여 공신이 되었다. 이후 [[이시애의 난]], [[남이의 옥]] 등으로 익대공신에 책록되었고 [[1506년]]에는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이 되었다. 서얼(庶孼) 출신으로서 무사가 되었다가 [[이시애의 난]]의 진압 때 세운 공로로 [[조선 세조|세조]]의 총애를 얻어 [[1468년]](세조 13년) [[병조|병조정랑]]으로 온양별시문과(溫陽別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관직은 [[병조]][[판서]], [[한성부 판윤|판한성부사]], [[황해도]]와 [[경상도]]의 [[관찰사]] 등을 지냈다.
 
그 뒤 [[의정부]] [[좌찬성]] 등을 거쳐 [[대광보국숭록대부]] 행[[의정부]][[좌찬성]], 겸 영경연사, [[충훈부]] 당상에 이르렀으며, 무령군(武靈君)에 봉작되었다가 무령부원군(武靈府院君)으로 진봉되었다. [[남이]]를 시기하여 그 남자의 시를 문제 삼아 사형까지 이르게 하였다. 학자 [[김종직]]과 벌인 감정싸움이 발단이 되어 [[이극돈]] 등의 [[무오사화]]에 동조했으며, 이후 [[사림파]] 공격에 가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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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사로 복무 중 [[건춘문]]을 지키는 갑사로 배정되었다가 [[1467년]](세조 12년) [[6월]] [[이시애의 난]]을 토벌할 방략(方略)을 왕에게 건의하였다. [[이시애]](李施愛)를 잡을 방략을 물으니 류자광의 건의가 [[조선 세조|세조]]의 마음에 들어 크게 포장(褒奬)을 더하고 명하여 겸사복(兼司僕)으로 승진했다. 곧 세조가 다시 백관을 불러 이시애를 잡을 방략을 묻자, 류자광의 초안이 세조의 눈에 띄어 왕이 내리는 [[어사주]]를 받고 노고를 치하(致賀)받았다. 그해 류자광은 [[이시애의 난]]에 자진하여 출전했다. 이때 건주위의 [[여진족]]과 싸우다가 귀를 부상(負傷)하기도 했다.
 
난이 끝나자 류자광은 서자로서 벼슬길을 허통(許通)받게 되었다. 바로 선략장군(宣略將軍) 부호군(副護君)<ref name="nate1">http://100.nate.com/dicsearch/pentry.html?s=K&i=271458&v=42{{깨진 링크|url=http://100.nate.com/dicsearch/pentry.html?s=K&i=271458&v=42 }}</ref>을 거쳐 변방의 야인을 토벌하려고 출정하였다.
 
==== 변방 근무와 관직 진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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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持平) 정효항(鄭孝恒)이 다시 반대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사간(司諫) 박안성(朴安性)이 불가하다고 상소했으나 왕이 전지를 내려 거절하였고 대사헌(大司憲) 양성지(梁誠之), 대사간(大司諫) 김지경(金之慶) 등이 류자광이 서자 출신이라는 연고(緣故)를 들어 정조의 낭관에 임명이 불가하다면서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왕에게 질책을 듣고 타 직책에 임명을 건의하였으나 역시 왕이 듣지 않았다.
 
[[1468년]]에 세조가 세자와 더불어 온양으로 행차할 때 총통장(總筒將)으로 종군하였다.<ref name="nate1"/>
 
=== 관료 생활 ===
==== 특별 급제와 남이의 옥사 ====
{{본문|남이의 옥}}
[[1468년]](세조 14년) 온양별시문과에 응시하였다가 낙방하였으나 [[조선 세조|세조]]의 특별 배려로 합격하였다. [[병조]][[참지]](兵曹參知, 정3품)가 되고<ref name="nate1"/>, 그해 [[6월]] 고령군(高靈君) [[신숙주]](申叔舟), 상당군(上黨君) [[한명회]](韓明澮), 능성군(綾城君) [[구치관]](具致寬), 영의정(領議政) [[조석문]](曹錫文)·우의정(右議政) [[강순]](康純)·동원군(東原君) [[함우치]](咸禹致)·[[호조]][[판서]] [[노사신]](盧思愼) 등과 함께 영복정(榮福亭)에 가서 조선(漕船)을 점검하고 돌아왔다. 이어 [[7월]] 호송관(護送官)으로 유구국(琉球國:현재의 오키나와) 사자를 호송하였다.
 
[[1468년]] [[조선 세조|세조]] 때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그해 평소 시기하던 [[남이]]의 말실수를 물고 늘어져 무고하여 숙청하고 이 공로로 익대공신 1등에 무령군(武靈君)으로 봉해졌다. [[남이]]는 [[조선 태종|태종]]의 외증손으로 숙부뻘인 [[조선 세조|세조]]의 특별 대우를 받았으나 그 뒤를 이은 [[조선 예종|예종]]이 남이를 혐오하는 사정을 류자광은 재빨리 간파하였다.
 
그 후 [[남이]], [[강순]] 등은 처형당했고 류자광은 고속으로 승진하여 [[병조]][[참지]]를 지내고 수충보사병기정난익대공신(輸忠保社炳幾定難翊戴功臣) 1등에 녹훈된 뒤 무령군(武靈君)에 봉해졌<ref name="nate1"/>으며봉해졌으며, 자헌대부로 승진했다. 류자광의 반인(伴人)이 류자광의 난언을 고하여 양사(兩司)에서 탄핵받아 서소(西所)에 구금되어 유배될 처지에 놓였으나 대왕대비의 비호(庇護)로 풀려났다.
 
이 사건은 [[임진왜란]] 이전 까지는 역모 사건이라고 인식되었지만, 그 이후 일부 야사에서는 류자광의 모함으로 날조된 옥사라고 규정하고 남이를 젊은 나이에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은 인물로 기술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남이의 옥을 날조 사건으로 기록한 대표할 정도로 전형이 될 만한 특징이 있는 책은 연려실기술인데 여기에는 류자광의 계략에 의거한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ref name="park127">박영규, 한 권으로 보는 조선왕조실록 (들불, 1998) 127페이지</ref> 조선 중기의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의 책임이 류자광에게 있다고 보는 시각이 팽배했으므로, [[임진왜란]] 이후에 일부 야사에서 [[남이]]를 비극처럼 슬프고 비참한 영웅으로 기술한다.<ref name="park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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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1년]] 겸 오위도총관(兼五衛都摠管) 등을 지냈다.
 
서기 1504년 연산군 재위 10년에는 [[이극돈]]의 형제인 [[이극균]]과 사귀었다는 것으로 언관들에게 탄핵받아 임사홍(任士洪)과 함께 직첩을 몰수당하고 경기도에 충군(充軍)되었으나<ref>충군(充軍);군대에 편입</ref> 곧바로 취소되었다.<ref name="nate1"/> 그 뒤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의 원흉이라는 공론 때문에 대간들에게 여러 차례 탄핵되어 한때 파직되었으나 판부사로 복직되었다.
 
[[1505년]] [[1월]] 석결명(石決明)을<ref>전복(全鰒) 껍데기</ref> 왕에게 사사로이 바친 일로 언관들에게 탄핵받자 [[연산군]]은 간관들의 거듭된 탄핵에 못 이겨 당시 탄핵한 언관들을 조사하게 하였고 [[4월]] [[의금부]]에서 류자광이 굴과 전복(全鰒)을 진상한 것을 비난한 언관들을 조사하여 앞장선 안윤덕(安潤德)은 율(律)이 장(杖) 80에, 김계행(金係幸)· 윤은보(尹殷輔)· 이곤(李坤) 등은 장 70을 논정하여 보고했다. [[연산군]]은 [[1506년]] [[1월 1일]]부로 류자광을 복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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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부 링크 ==
* [http://100.nate.com/dicsearch/pentry.html?s=K&i=271458&v=42 류자광]{{깨진 링크|url=http://100.nate.com/dicsearch/pentry.html?s=K&i=271458&v=42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7a1669a 류자광]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1&aid=0000320397 역사를 바꾼 이인자들]
* [http://mbn.mk.co.kr/pages/news/newsView.php?news_seq_no=516084&category=mbn00007 유물 수년째 방치…도난 말썽] - 매일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