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아편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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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편 무역 ===
[[건륭제]] 말기부터 관리들의 부정축재와 부정부패로 쇠퇴하기 시작한 청나라는 [[1780년대]]부터 [[영국 동인도 회사]]와 무역을 하게 된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광둥 무역에서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여 중국으로부터 [[차]], [[도자기]], [[목면]] 등을 수입하고 영국의 [[모직물]], [[면직물]] 등을 수출했다. 당시의 영국에서는 차를 마시는 풍습이 상류계급 간에 퍼져, 차, 도자기, [[비단]]을 대량으로 청나라로부터 수입하고 있었다. 한편, 영국에서 청나라로 수출되는 것은 [[시계]], [[망원경]]과 같은 부유층을 대상으로 한 물품은 있었으나, 대량으로 수출가능한 제품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영국의 대폭적인 수입초과였다.<ref>{{lang|ja|『近代の誕生 第Ⅲ巻』p.113}} 영국의 주요수출품이었던 면직물의 수요는 거의 없었다. 반면, 청나라는 1810년부터 1820년까지 2600만 달러의 무역흑자를 기록하고 있었다. </ref> 영국은 [[미국 독립 전쟁]]의전쟁의 전비 조달과 산업혁명에 의한 자본축적으로 인해, 은(銀)의 국외유출을 억제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런데, 청나라 조정에서는 공행(서양 물품을 취급하는 양행 상인들의 조직) 관세를 자의적으로 부과하였고 외국상인의 무역을 제한했다. [[광동 체제]]를 타파하고 무역을 확대하기 위한 교섭에 실패한 영국 상인들이 이때 생각해낸 무역 적자 해소 방법이 [[아편 무역]]이었다.
 
은의 유출을 막기 위해 영국은 식민지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청나라에 밀수출하여 무역 적자를 상쇄하고, 삼각무역을 정립하게 되었다. 영국 상인들은 육체 노동으로 지친 중국의 하층민들을 대상으로 아편장사를 했고, 아편은 19세기 중국의 히트상품이 되었다. 청나라에서는 이미 1796년 ([[가경제]] 원년)에 [[아편]]의 수입을 금지하고 있었다. 금지령은 19세기에 들어서서도 여러번 발령되었으나, 아편 밀수입은 그치지 않고, 또한 국내산 아편 단속도 효과가 없었으며, 청나라에서 아편 흡입의 악폐가 널리 펴져, 건강을 해치는 자가 많아지고, 풍기도 퇴폐스러워졌다. 모든 계층에 퍼져 나간 아편 흡입 풍조로 청나라에서는 부패와 전투 능력 상실, 국가 기강 해이, 농촌 경제 파탄, 재정 타격 같은 폐단이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