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요이 시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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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요이 시대'''({{llang|ja|弥生時代}};미생시대)는, [[홋카이도]], [[오키나와 섬|오키나와]]를 제외한 [[일본열도]]의 시대구분 중 하나이며, [[조몬 시대|조몬시대]]에 후에 이어지며, [[고훈 시대|고훈시대]]의 전에 해당하는 약 [[기원전 3세기]] 부터 [[3세기]] 중반까지에 해당하는 [[시대]]의 명칭이다.
 
[[조몬 시대]]에 특히 한반도로부터 큐슈를 지나서 일본으로 들어온 도래인들인 야요이인들은 [[기원전 3세기]] 경부터 일본 열도 각지, 특히 유래지에서 가까운 규슈큐슈 지역에 씨족 단위의 촌락을 형성하고 을 한반도를 비롯한한반도 지역의 문화를 일본으로 전래시켰다. 이 시대의 문화를 [[야요이 문화]]라고 한다.<ref name="구태훈">구태훈 (2009), 《일본사 파노라마》</ref> {{Rp|18}} 야요이 문화는 금속기의 병용(倂用)과 수도경작(水稻耕作)을 특징으로 하며, 곡물 축적과 관개용수 통제 등이 원인이 되어 계급이 분화하고, 각지에 사제자(司祭者)를 왕으로 한 소국가(小國家)가 성립되었다.<ref>{{서적 인용 |제목=[[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장=[[: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지리/세계의 여러 나라/아시아/일 본#일본의 역사|일본의 역사]] |연도= 2004|출판사=도서출판 범한 |인용문=BC 3세기경에 금속기의 병용(倂用)과 수도경작(水稻耕作)을 특징으로 하는 야요이(弥生) 문화가 서(西)일본에서 일어나 곡물 축적과 관개용수 통제 등이 원인이 되어 계급이 분화하고, 각지에 사제자(司祭者)를 왕으로 한 소국가(小國家)가 성립되었다.}}</ref> 기원전 5세기 중반에 처음 한반도에서부터 큐슈 북부로 수전경작기술을 중심으로 한 생활 체계가 전해지고, 기원전 3세기부터는 본격적으로 [[큐슈]], [[시코쿠]], [[혼슈]]를 지나 토호쿠 북부까지 전해졌다. 초기의 논은 [[후쿠오카 시]] [[하카타 구]]에 있는 이타즈케 유적과 [[사가현]] [[가라쓰 시]]의 나바타케 유적과 같이 큐슈 북부지역에 집중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야요이 시대의 시작이다. 죠몬인들이 살던 죠몬 시대후기부터, 대규모 관개 시설을 필요로 하지 않는 어업과 수렵을 대부분이 하였고 밭에 심는 벼의 재배(陸稻耕作)은 매우 소규모로 있었지만, 한반도에서 건너간 야요이(彌生)시대에서는 처음으로 대규모 관개 시설을 사용하는 경작이 도입되었다(水稻耕作).
 
== 수도경작(水稻耕作) ==
야요이 시대에는 특히 수도경작(水稻耕作)가 도입되어 곡물의 비축이 가능해지면서 잉여작물의 생산과 축적이 발달하여, 이것이 부(富)에 연결되어 가지는 것과 가지지 못하는 것, 더 나아가서 빈부의 차와 상하관계가 생겨났다. 또한 대규모 관개 시설을 사용한다 벼농사 기술의 도입에 의해 개간과 농업용수의 대규모의 노동력이 필요하게 되어 집단의 대형화가 진행되었다. 대형화된 집단 사이에서는 부와 경작지, 수리권(水利権) 등을 둘러싸고 싸움이 발생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싸움을 통한 집단의 통합, 상하관계가 진전된 결과 각지의 조그만 나라가 생기고 3세기 중엽에 [[야마타이코쿠]]의 여왕 [[히미코]]가 [[위 (삼국)|대륙에]] 조공을 했다는 중국 사서중국사서 기록이 있으나 일본학자들은 일본서기,고사기와 외국 사서등에서는외국사서등에서는 히미코를 찾아볼 수 없고 중국의 무분별한 외국 조공 기록에 의심을 품어서가지고 있으며 히미코가 실존실존인물인지에 인물인지대해서는 부정적으로 실존자체가 확실치 않다. 덧붙여 이 무렵 이후 일본은 한반도와 대륙에서 [[왜]]라고 불려졌다. 특히 야요이인들이 한반도 북부와 남부에 살고 있던 도래인이라는 증거는 야요이의 묘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본에서 카메칸보라고 불리우는 옹관묘는 한반도 남부에서 전해져서 이토시마반도(糸島半島),시마바라반도의 후쿠오카시(島原半島),사가현 칸자키군에 많이 분포되어 있으며 특히 한국에만 발견되는 지석묘(支石墓)의 경우에는 큐슈의 이토시마반도,시마바라반도에 퍼져갔다.또한 한반도 남부에 대량으로 발견되는 방형주구묘(方形周溝墓)는 야요이의 방형주구묘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북부 큐슈에 방형주구묘가 발견되며 특히 일본 칸사이 킨키 지방까지 퍼져 킨키 지방에 방형주구묘가 대량으로 발견되었다.야요이 시대 중기에는 중부지방,관동지방(中部地方,関東地方)까지 퍼지게 된다.
 
== 한반도의 야요이인 일본진출(韓半島弥生人日本列島進出) ==
 
특히 야요이인들이 한반도(韓半島) 북부와 남부에 살고 있던 한반도 도래인(韓半島渡來人)이라는 증거(證據)는 야요이(弥生人)의 묘제(墓祭)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본에서 카메칸보라고 불리우는 옹관묘는 한반도 남부에서 전해져서 이토시마반도(糸島半島),시마바라반도의 후쿠오카시(島原半島),사가현 칸자키군에 많이 분포되어 있으며 특히 한국(韓國)에만 발견되는 지석묘(支石墓)의 경우에는 큐슈(九州)의 이토시마반도(糸島半島),시마바라반도(島原半島)에 퍼져갔다.또한 한반도 남부(韓半島南部)에서 대량으로 발견되는 방형주구묘(方形周溝墓)는 야요이인(弥生人)의 방형주구묘(方形周溝墓)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큐슈북부(九州北部)에서부터 방형주구묘(方形周溝墓)가 발견되며 특히 일본 칸사이 킨키 지방(近畿地方)까지 퍼져 킨키 지방에 방형주구묘가 대량으로 발견되었다.야요이 시대 중기(中期)에는 한반도(韓半島)의 방형주구묘(方形周溝墓)가 일본열도(日本列島)의 중부지방,관동지방(中部地方,関東地方)까지 도래(渡來)하게 된다.
 
== 명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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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경==
수도경작은수도경작(水稻耕作)은 기원전 1200년경부터 한반도에서만한반도(韓半島)에서만 사용되었다. 기존에는 [[무거동]]과 [[마전리]] 유적을 통해 기원전 7~5세기를 최상한 연대로 보았으나, 2015년 5월 [[세종시]]에서 약 4000평 가량의 논농사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기원전 12~13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3세기 한반도로부터 일본 열도(특히, 큐슈)로 사람들이 이동하였는데<ref>{{서적 인용 |제목= 21세기 한반도와 주변 4강대국 | 저자= 강성현|연도= 2005 |출판사=가람기획 |쪽= 156 |id={{ISBN|89-8435-224-1}} |인용문= 김달수의 《일본 열도에 흐르는 한국 혼》에 의하면 고대 한반도의 고구려․백제․신라․가야국으로부터 일본 열도로의 이동이 시작된 것은 기원전 3세기, 일본의 이른바 야요이(彌生)시대부터였다고 한다.}}</ref> 이들 고대 한국인(야요이인)들이 일본에 대규모 관개 시설을 사용하는 경작(水稻耕作)을 전수해주었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ref>{{웹 인용 |url=http://news.sciencemag.org/sciencenow/2003/05/30-03.html?ref=hp |제목=Earlier Start for Japanese Rice Cultivation |저자=Dennis Normile |출판사= Sciencemag |날짜=2003-05-30 |인용문= One theory holds that immigrants fleeing the turmoil of China's Warring States period, beginning about 450 B.C., took the technology overland to present-day Korea, then across the relatively narrow Korea Strait to Japan's Kyushu Island. An alternative theory is that seafaring traders carried the technique to lands bordering the Yellow and East China seas around 1000 B.C. or earlier.}}</ref> 또한, 일본인 학자에 의해 일본 각지의 초기 논의 구조 형태와 농기구들, [[토기]], 주거 형태와 부락 등을 통해 그러한 주장이 고고학적으로도 규명되고 있다. 한반도 벼농사의 도래에 관해 [[교토대학]] 사학과의 가도와키 데이지(門脇禎二) 교수는 토기의 고고학 측면에서 다루고 있다.
 
[[이타즈케]]에서 시작한 벼농사와 한민족으로 부터 전수받은 청동기를 특징으로 한 야요이 문화는 세토 내해를 통해 동쪽으로 전해졌는데, 현재 [[후쿠오카]]와 [[가라쓰]], [[요시노가리]], 그리고 세토 내해의 [[오카야마]], 킨기 지방의 [[나라 분지]]에 전해졌으며 이를 바탕으로 [[쿠니]]들이 세워졌다. 수도경작은 [[기원전 2세기]] 이후에는 [[주부 지방]]에 보급되었고, [[1세기]] 전까지 [[간토]]와 [[도호쿠]] 남부에 전파되었다. 최종적으로 [[3세기]]까지 도호쿠 북부까지 벼농사가 전파됨으로써 홋카이도를 제외한 고대 일본은 3세기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농경 생활이 행해지기 시작한다.<ref name="구태훈"/> {{Rp|1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