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케후 마사유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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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구단 =
|등번호 =
|선수 사진 파일명 = KakefumasayukiMasayuki 150829Kakefu IMG 3588-2 20181222.JPGjpg
|사진 사이즈 = 250220
|사진 설명 = 한신2018년 DC12월 시절<br22일 />(2015년 8월 29일, [[한신 나루오하마 구장]]에서)촬영
|국적 = [[일본]]
|출신지 = [[지바현]] [[지바시]] [[주오구 (지바시)|주오구]]<br />([[니가타현]] [[산조시]] 태생)
|생년월일 = {{출생일과 나이|195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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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에는 [[검도]]를 시작하여 경찰서에서 연습했으나 초등학교 시절 보호구를 사달라고 부모님에게 요청하였지만 거절당해 하는 수 없이 그만뒀다. 아버지가 중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복귀하자 아버지의 밑에서 야구를 시작했다. 이때 아버지에 의해 주로 쓰는 팔을 교정받았다는 자료가 많았지만 실제로는 교정한 바 없으며 본인도 오른손으로 던지고 왼손으로 치는 선수가 된 이유는 모르겠다고 밝혔다. 참고로 펜을 잡을 때는 오른손, 젓가락을 잡을 때는 왼손을 사용한다.<ref>[http://www.sanspo.com/baseball/photos/20161209/tig16120910000001-p1.html {{lang|ja|【掛布雅之のホットコーナー】遠井吾郎さんがONが味つけしてくれた野球人生}}] - 산케이 스포츠, 2016년 12월 9일</ref>
 
나라시노 고등학교 2학년 때 이시이 요시히로 감독의 지휘 하에 4번 타자 겸 [[유격수]]로서 1972년 하계 고시엔 지바현 대회(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지바 대회)에 예선에서 승리했고 히가시간토 대회 결승에서는 유력한 우승 후보로 거론되던 조시 상업고등학교와 맞대결을 펼쳤다. 이 경기에서 [[네모토 다카시 (야구인)|네모토 다카시]] 투수로부터 선제점이 되는 안타를 날려 2대 0의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고시엔 대회(제54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는 1차전 상대인 도요 대학 부속 히메지 고등학교와의 경기에서 패했다(당시 히메지 고등학교에는 훗날 [[한신 타이거스]]에서 팀 동료가 되는 [[야마카와 다케시]]가 있었는데 이 경기에서 만루 홈런을 때려냈다). 3학년 때인 1973년 하계 소속 현 예선 준준결승에서 에이스 [[후루야 히데오]]가 소속된 기사라즈추오 고등학교에게 연장 11회 접전 끝에 1대 2로 끝내기 패배를 당해 고시엔 진출에는 실패했다. 더욱이 팀 동기로 함께 클린업 타자로 활약했던 [[아베 신노스케]]의 아버지이다. 두 살 아래인 [[오가와 준지]](1975년 하계 대회 우승 투수)는 당시 가케후가 [[죽도]] 주머니에 방망이를 넣어 매일 자신의 집에 가지고 돌아갔다고 말했다.<ref name="wbol160127">[http://column.sp.baseball.findfriends.jp/?pid=column_detail&id=002-20160127-01 {{lang|ja|掛布雅之×小川淳司 習志野高OB対談 「あの当時“集合”がイヤでしたね」}}] - 슈칸 베이스볼 ONLINE, 2016년 1월 27일</ref>
 
그해 가을, 아버지의 지바 상업고등학교의 야구부장 겸 감독이었던 시절 제자였던 [[오가와 요시하루]] 당시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야쿠르트]] 2군 감독에게 입단 부탁을 넣었다가 거절당해 당시 지바 상업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을 맡았던 시노다 히토시에게 프로 구단의 중개 역할을 부탁했다. 시노다와 친분이 있던 한신의 [[안도 모토오]](그 해를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하고 코치를 맡음)에게 중개를 부탁한 덕분에 당시 [[가네다 마사야스]] 감독에게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2군 캠프에 대동했다(사실상의 입단 테스트였다고 한다). 드래프트그해 드래프트에서 6순위로 지명됐고 계약금 500만 엔, 연봉 84만 엔으로 입단 계약을 맺었다.
 
=== 프로 야구 선수 시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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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단 이후 1974년 춘계 스프링 캠프에서 철저한 단련을 받았다. 시범 경기에서의 첫 출전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난카이 호크스]]전이었는데 같은 해 [[노자키 쓰네오]](1971년 드래프트 1순위로 난카이에 입단)로부터 대타로서 첫 안타를 기록했다. 시범 경기에 첫 선발로 출전한 것은 3월 21일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스]]전([[도쿠시마현 나루토 종합 운동 공원 야구장|나루토 구장]])에서 중심축인 [[유격수]] [[후지타 다이라]]가 결혼식 때문에 경기에서 빠져 7번·유격수 자리에 그 대역으로 들어간 것이었으나 [[히가시오 오사무]]를 상대로 4타수 2안타를 기록했다. 그리고 3일 후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긴테쓰 버펄로스]]전([[닛폰 생명 구장]])에서는 내야의 중심인 [[노다 유키토시]](이후에는 매니저)가 모친상을 당하여 귀향하는 바람에 또다시 가케후가 8번·[[3루수]]로 대신 출전하게 됐는데 이 경기에서 4타수 4안타를 기록하는 맹활약을 펼쳤다. 시범 경기가 끝난 뒤 최종 성적은 18타수 8안타, 2개의 2루타를 때려내는 등의 활약으로 개막 1군에 합류, 고졸 1년 째에 개막전 1군에 정착했으며 같은 해에는 주니어 올스타전에도 출전했다. 고졸 신인으로서 1군에서의 홈런은 3개이며, 구단 기록의 8개(1957년, [[나미키 데루오]])에는 미치지 못했다.
 
고교 시절에는 유격수였지만 당시 한신에는 후지타 다이라가 부동의 주전이었기 때문에 3루수를 맡았다. 가케후와 같은 해 드래프트 1순위로 입단한 [[사노 노리요시]]도 3루수였기 때문에 포지션 경쟁이 벌어졌다. 1975년에 감독으로 취임한 [[요시다 요시오]]는 당초 상대가 우완 투수일 때는 좌타자 가케후, 좌완 투수일 때는 우타자 사노를 기용하는 식으로 나갔으나 가케후가 곧바로 3루수 자리를 굳혔고<ref>요시다에 의하면 당시 [[이치에다 슈헤이]] 코치가 가케후를 강력 추천했다고 한다(《우시와카마루의 이력서》 닛케이 비즈니스 인문고, 2009년, p.161).</ref> 사노는 외야수로 옮겨갔다. 가케후가 포지션을 둘러싸고 라이벌로“라이벌로 느낀 것은 이 때의 사노 밖에 없었다고없었다”고 한다. 1980년에 [[와세다 대학]] 출신의 거물급 3루수였던 [[오카다 아키노부]]가 입단했을 때에도 언론이 “포지션 쟁탈전이 벌어지나?”라고 떠들썩했을 때도 가케후는 이미 팀의 중심 선수로서 여유가 넘쳤고 사노만큼 라이벌 의식은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ref>분슌 비주얼 문고 - ‘호타열전 2’, [[분게이슌주]]</ref>
 
1976년, [[오 사다하루]]를 웃도는 타율 5위에 랭크되며 같은 해 [[일본 프로 야구 베스트 나인|베스트 나인]]에 선정됐는데 가케후는 “타격 10위권에서 사다하루보다 위에 섰다는 게 큰 자신감을 느꼈다”라고 말했다.<ref>분슌 Number 비디오 - ‘열투! 한신 vs 요미우리 1200 경기’, [[분게이슌주]]</ref> 더 나아가 이듬해인 1977년에도 대활약을 펼쳤고, 응원가 ‘GO! GO! 가케후’도 대대적으로 팔리기도 했다. 이러한 인기에 힘입어 응원단은 가케후가 타석에 들어서면 응원가를 연주하게 됐다. 최초의 응원가는 ‘GO! GO! 가케후’의 후렴구였는데 후에 변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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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대 ====
이듬해 1980년에는 왼쪽 무릎 부상으로 인해 70경기 출전에만 그쳤고 성적도 급격하게 떨어졌다. 그러자 시즌이 끝난 후 스포츠 신문에서는 “가케후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난카이]]에 방출하고 여러 명의 투수들과 트레이드”라는트레이드”를 비롯해 “트레이드 상대가 [[가도타 히로미쓰]]” 등이라는 내용의 특종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ref>[http://www.sankei.com/west/news/170121/wst1701210005-n1.html {{lang|ja|「トレードなら引退」掛布は決意していた}}] - 산케이 신문(산케이 WEST), 2017년 1월 21일</ref><ref>《요미우리-한신론》에 따르면, [[가도타 히로미쓰]]와의 ‘미도스지 트레이드’({{lang|ja|御堂筋トレード}})였다고 한다(p.180). 가케후는 만약 이 트레이드가 성립됐다면 자신은 은퇴할 생각이었다고 밝혔다.</ref> 구단측은 즉각 부인했으나 [[에나쓰 유타카]]와 다부치 고이치의 방출 소동이 여전히 기억에 생생하던 무렵이라 근거없는 기삿거리라는 해명으로 무마될 내용이 아니었다. 가케후 본인도 큰 충격을 받았으며 이런 얘기가 나돌지 않도록 식이요법과 같은 건강 관리를 조절하는 등 이듬해 1981년부터 1985년까지 5년 연속 전 경기에 출전하는 대기록을 달성하게 됐고 트레이드설도 백지화 됐다.
 
1982년과 1984년에도 홈런왕을 차지했고 특히 1982년에는 [[일본 프로 야구 최다 타점|타점왕]]을 석권하는 등 다부치를 대신하는 새로운 ‘미스터 타이거스’라는 별명으로 최고의 인기를 끌었다(더욱이 당시에는 1979년에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세이부 라이온스]]로 이적한 다부치가 미스터 타이거스는 아니라고 말했고 가케후가 후지무라 후미오, [[무라야마 미노루]]로 계속되는 3대째의 미스터 타이거스라고 칭했으나 2002년에 다부치가 타격 코치로서 한신에 복귀한 이후에는 다부치를 3대째, 가케후를 4대째라고 부르는 것이 증가하고 있다). 1980년대 전반기에는 부동의 4번 타자였는데 동갑내기이기도 한 [[에가와 스구루]]와의 맞대결은 두 사람 모두 전성기였던 1980년대 전반의 일본 프로 야구 최고의 명승부로 꼽힌다. 1984년에 홈런왕을 차지했을 때는 [[주니치 드래곤스]]의 [[우노 마사루]]와 치열한 타이틀 경쟁을 펼쳤는데 마지막 맞대결 2연전에서 가케후와 우노 두 사람이 모든 타석에서 [[고의 사구]]를 당하며 결국 타이틀을 나눠가지게 됐다. 이들과의 승부를 피했던 고의 사구에 대해 [[센트럴 리그]] 회장이 두 팀의 감독([[안도 모토오]]와 [[야마우치 가즈히로 (1932년)|야마우치 가즈히로]])에게 주의를 줬고, 최종적으로는 기자단에게 사과하는 선에서 마무리 됐다.<ref>[https://www.sponichi.co.jp/baseball/yomimono/professional_bbd0710/kiji/K20101001Z00002940.html {{lang|ja|【10月3日】1984年(昭59) 満塁でも敬遠 宇野勝と掛布雅之 前代未聞の10連続四球}}] - 스포츠 닛폰, 2010년 10월 1일</ref>
 
1985년에는 3번 바스, 4번 가케후, 5번 [[오카다 아키노부]]로 이어지는 강력한 클린업 트리오를 형성하여 한신의 리그 우승 및 [[1985년 일본 시리즈|일본 시리즈]] 우승에도 큰 기여를 했다. 같은 해 4월 17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에서전에는 상대 투수 [[마키하라 히로미]]로부터 일명 ‘[[백 스크린 3연발]]’(가케후는 백 스크린 왼쪽에 들어갔기 때문에 상금을 놓칠 뻔하다가 스폰서의 재량으로 받았다)을 터뜨렸는데 이 경기에서는 바스에 이어 홈런을 때려내 그 해의 상징으로 회자되고 있다. 또, 요시다 감독은 일본 시리즈 우승과 관련한 기자 회견에서 일본 시리즈 정상에 오른 요인을 물었을 때 “안에는 일본을 대표하는 4번(타자)이 있었으니까”라고 대답했다.
 
1986년 4월 20일 주니치전에서 신인이자 상대 투수인 [[사이토 마나부 (야구인)|사이토 마나부]]가 던진 [[몸에 맞는 볼]]에 손목을 맞아 골절돼 연속 경기 출장 기록이 663경기로 중단됐다.<ref>[https://www.sanspo.com/baseball/photos/20140122/tig14012205040012-p5.html {{lang|ja|左手小指に死球を受け痛がる阪神・掛布DC}}] - 산케이 스포츠, 2014년 1월 22일</ref> 훗날 가케후는 이 부상으로 그 때까지 팽팽하게 조여져 있던 긴장의 끈이 끊어지면서 부상을 변명으로 삼는 ‘나약한 자신’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튀어나왔다고 토로했다.<ref name="GTP127">또한 1989년에 [[와세다 대학]] [[오쿠마 강당]]에서 [[야자와 겐이치]](전 주니치 선수)와 강연회를 했을 때에는 “사이토 선수의 제구력은 알고 있었다. ‘위험하다, 온다’라고 알고 있었으면서도 끝내 피하지 못했던 게 유감이었다”라고 말했는데 원망하는 듯한 발언은 없었다(《요미우리-한신론》 p.127).</ref><ref>[https://www.daily.co.jp/tigers/2017/02/24/0009945033.shtml {{lang|ja|掛布氏、引退の理由明かす 「厳しい目から逃げた」 弱さを悔いる}}] - 데일리 스포츠, 2017년 2월 24일</ref> 5월 중순에 복귀했지만 11일 후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열린 요미우리전에서 3루 수비를 하던 도중 바운드된 타구에 맞아 오른쪽 어깨를 다쳐 한 달 가까이 결장했다. 게다가 8월 26일에는 골절 때문에 세 번째로 팀 전력에서 이탈했다가 시즌 종료가 임박한 시점에서야 겨우 복귀했다. 이 시즌 후반 이후, 화려한 배팅은 그림자를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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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 1989년부터 2015년까지 [[호치 신문]] 야구 평론가, 1989년부터 2008년까지 [[닛폰 TV 방송망|닛폰 TV]]와 [[요미우리 TV]]의 야구 해설자, 2009년부터 2012년까지 [[마이니치 방송|MBS 라디오]]의 해설자(2009년에만 게스트 해설, 2010년부터는 전속), 2013년부터 2015년까지는 [[선 TV]]와 [[스카이 에이]]의 해설자를 맡았다.
 
2013년까지는 [[미국]] [[마이너 리그 베이스볼|마이너 리그]]의 임시 코치를 맡은 적은 있지만 감독이나 코치 경험은 단 한 번도 없을 정도의 프로 야구를 본격적으로 지도한 경험은 없었다.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발족 당초(2004년 가을)에는 라쿠텐 구단으로부터 초대 감독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ref>‘{{lang|ja|楽天、掛布氏に監督就任を正式要請}}’ - 아사히 신문, 2004년 10월 16일</ref> 이를 고사했고, 결과적으로 [[다오 야스시]]가 초대 감독으로 취임했다. 이 건에 대해 실제로 가케후는 라쿠텐의 [[미키타니 히로시]] 구단주에 의해서 흡사 장난감 취급을 당했다는 사실을 선배인 [[가토 히로카즈]]로부터 1년이 지난 10월에야 전해졌다. 가케후 자신은 경영상 수익을 내라는 미키타니의 강력한 요구가 자신이 바라는 감독상과 어긋나서 결국 고사했다고 말했다.<ref>《요미우리-한신론》 p.207 ~ 208</ref> 그 외에도 [[지바 롯데 마린스]]의 구단주 대행하고도 한 차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지만 야구관이 맞지 않았다고 한다(최종적으로는 [[야기사와 소로쿠]]가 감독으로 취임).<ref>《요미우리-한신론》 p.210</ref>
 
==== 한신 DC 시절 ====
[[파일:Kakefumasayuki 150829.JPG|thumb|200px|한신 DC 시절(2015년 8월 29일, [[한신 나루오하마 구장]]에서)]]
2013년 10월 21일, 한신 구단에서 신설 직책인 제너럴 매니저 지휘 육성 및 타격 코디네이터(DC)에 취임한다고 발표했다<ref>[http://hanshintigers.jp/news/topics/info_3025.html {{lang|ja|掛布雅之氏のGM付育成&打撃コーディネーター就任について}}] - 한신 타이거스 공식 사이트, 2013년 10월 21일 방송</ref>. 현역 은퇴한 지 25년 만에 한신에 복귀하게 됐고, 동년 11월의 추계 캠프에서 타격과 내야 수비의 지도를 시작했다. 그러나 DC는 비상근 취급이며 등번호 및 벤치에 들어가지 않는 특별직이기 때문에<ref>[http://www.sanspo.com/baseball/news/20131022/tig13102205040010-n2.html {{lang|ja|前代未聞の超大役!阪神・掛布氏、コーチも“コーチ”する!!}}] {{웨이백|url=http://www.sanspo.com/baseball/news/20131022/tig13102205040010-n2.html |date=20131024054717 }} - 산케이 스포츠, 2013년 10월 22일</ref> 부임한 이후에도 야구 해설가·평론가로서의 활동도 계속하고 있었다. 또, 계약상 유니폼 중에서 바지를 착용할 수 없었는데 선수를 지도할 때는 구단으로부터 지급받은 점퍼, 트레이닝 웨어, 셔츠를 윗옷에 착용하고 있었다.<ref name="DC">[http://www.nikkansports.com/baseball/news/p-bb-tp0-20131105-1214003.html {{lang|ja|虎掛布DC「栄光の背番号」後継者の条件}}] - 닛칸 스포츠, 2013년 11월 5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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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신 2군 감독 시절 ====
한신 구단에서는구단은 같은 달인 26일에 가케후를 2군 감독으로서 정식 계약을 맺었고<ref name="Tigers farm"/> 이튿날인 27일에는 2군 감독을 취임한 것과 동시에 현역 시절에 착용했던 등번호 31번으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ref>[http://www.nikkansports.com/baseball/news/1558321.html {{lang|ja|金本監督背番号6、掛布二軍監督は31/阪神組閣一覧}}] - 닛칸 스포츠, 2015년 10월 27일</ref> 계약 기간은 2년이며, 가케후가 한신의 유니폼을 정식으로 착용한 것은 현역에서 은퇴한 지 27년 만의 일이다. 그리고 한신 선수나 수뇌진이 등번호 31번을 착용한 것은 [[외야수]]로 활약했던 [[린웨이주]]가 퇴단(2013년)한 이래 2년 만이다.
 
2군 감독으로 취임한 후에는 치열한 프로 의식을 젊은 선수들에게 심어주면서 선수의 자주성을 중시하는 지도로 팀의 향상에 주력했다.<ref name="gap">[http://www.sanspo.com/baseball/news/20170911/tig17091105050001-n3.html {{lang|ja|阪神・掛布二軍監督、今季限りで退任 考え方に隔たり…金本監督と並び立たず}}] - 산케이 스포츠, 2017년 9월 11일</ref> 타격 코디네이터 시절부터 지도했던 [[이토 하야타]], [[나카타니 마사히로]], [[하라구치 후미히토]] 등을 1군에 승격시켰으며 2016년 춘계 스프링 캠프에서는 신인 외야수 [[다카야마 슌]]과 일대일로 마주 대하며 다카야마의 [[일본 프로 야구 최우수 신인|센트럴 리그 신인왕]] 타이틀을 석권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ref>[https://www.nikkansports.com/baseball/column/naruohama/news/1831747.html {{lang|ja|掛布2軍監督、大山に4番英才教育!期待応えてこそ}}] - 닛칸 스포츠, 2017년 5월 29일</ref> 2017년에는 신인 내야수 [[오야마 유스케]]에 대해서 가네모토의 장기적 육성 계획하에 3월부터 영재 교육을 실시했다.<ref name="page">[https://thepage.jp/detail/20170909-00000002-wordleafs {{lang|ja|阪神・掛布2軍監督が今季限りで電撃退任!}}] - THE PAGE, 2017년 9월 10일</ref> 오야마는 그해 7월부터 1군에 합류하면서 8월 종반부터 시즌 종료 때까지 1군 공식전 선발 4번 타자를 맡았다. 한편 우타자였던 [[마에다 야마토|야마토]]의 스위치 히터에 대한 전향과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한 [[이토이 요시오]], [[니시오카 쓰요시]]의 재활 등 중견·베테랑 선수들에 대한 지원에도 힘을 쏟았다.
 
2군 감독으로 재임하면서 현역 시절의 이름값의 높이를 배경으로 구단이 주최하는 웨스턴 리그 공식전에서 2군임에도 불구하고 만원으로 표가 매진된 것과 1만 명 대의 관객 동원이 잇따랐다. 2016년 종반 이후에는 현역 선수 시절의 경험으로부터 젊은 선수들에게 맹연습을 요구하는 가네모토와의 사이에서 육성 방침과 웨이트 트레이닝에 대한 인식차가 서서히 드러났다.<ref name="gap" /> 한신 구단도 다음 2018년 시즌을 위한 팀 방침의 전환과 2군 수뇌진의 세대 교체를 시야에 두고<ref name="page" /> 가케후를 ‘2군 감독으로서의 역할은 계약 기간 2년 간으로 충분히 이뤄졌다’라고 판단했다. 이 때문인지 2017년 시즌 막판인 9월 8일에는 같은 해 10월 31일 계약 기간 만료를 계기로 2군 감독으로서의 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2018년 시즌부터 구단측은 오너부 어드바이저를 맡아달라고 요청하는<ref>[http://www.sanspo.com/baseball/news/20170910/tig17091012300019-n1.html {{lang|ja|阪神・掛布二軍監督、今季限りでの退任表明 8日に球団から契約満了の通告}}] - 산케이 스포츠, 2017년 9월 11일</ref> 한편 9월 10일에는 2017년 시즌 끝으로 2군 감독에서 물러나기로 했다는 내용을 공식 발표했다.<ref name="page" /> 더 나아가 2군 감독으로서 마지막으로 지휘하는 주최 경기(9월 28일 웨스턴 리그, 대 히로시마 최종전)에서는 사용하는 구장을 [[한신 나루오하마 구장]](관중석 수용 인원 500명)에서 한신 고시엔 구장(2군전에서 개방하는 내야석에 28,465석을 설치)으로 급거 변경됐다.<ref>[https://www.daily.co.jp/tigers/2017/09/13/0010550325.shtml {{lang|ja|掛布二軍監督、最終戦が甲子園に 退任発表受け変更}}] - 데일리 스포츠, 2017년 9월 13일</ref> 평일 낮 경기에도 불구하고 7,131명의 관중이 내야석에서 지켜본 이 경기를 감독 재임 중 최다인 16득점에 의한 대승으로 경기를 마쳤다. 또한 경기 후 인터뷰에서 자신의 첫 감독 생활을 “나를 젊어지게 해준 2년이었지만 조금은 짧지 않았는가... 하지만 젊은 선수들이 착실하게 실력을 키웠다. 그런 의미에서 상당히 의미가 있는 2년이었다”라는 표현으로 말했다. 그 후에 선수와 코칭 스태프들이 헹가래를 해주려했지만 감독 재임 중 팀을 웨스턴 리그 우승으로 이끌지 못했던 것을 배경으로 “헹가래는 승자(우승 팀 감독)나 현역에서 은퇴한 선수들이 받는 것이지, 내가 그런 걸 받을 사람이 아니다”라는 이유를 들어 헹가래받는 것을 사양했다.<ref>[https://www.nikkansports.com/baseball/news/201709290000085.html {{lang|ja|退任の掛布2軍監督が最終戦で胴上げを拒否した理由}}] - 닛칸 스포츠, 2017년 9월 29일</ref>
 
또한 위에서 말한 최종전 이후 가케후를 곁에서 지원한 [[후루야 히데오]] 야수 수석 겸 육성 코치(전 2군 감독), [[구보 야스오]] 투수 수석 코치, [[이마오카 마코토]] 타격 겸 야수 종합 코치가 줄줄이 퇴단했다. 이 시점에서 가케후는 2군 감독 계약 기간을 남겨두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후임 감독이 확정될 때까지 [[야마다 가쓰히코]] 2군 배터리 코치가 2군 감독 대행으로서 팀을 지휘했다.<ref>[https://www.daily.co.jp/tigers/2017/09/30/0010600078.shtml {{lang|ja|古屋&久保二軍両コーチも退任 山田二軍コーチが監督代行}}] - 데일리 스포츠, 2017년 9월 30일</ref> 2017년 10월 23일에 구단측은 야마다가 2018년 시즌부터 1군 배터리 코치, 그리고 1군 작전 코치 겸 배터리 코치였던 [[야노 아키히로]]가 2군 감독으로 부임했다는 내용을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