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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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
진시황 즉위 이전에는 중국은 왕(王)칭호를 썼다.
기원전 220년대에 [[진 시황제]]가 황제의 칭호와 각종 용어를 정립한 이래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자국의 최고 [[군주]](君主)를 황제라 하였다. 이는 [[한족]]이 건국한 왕조뿐만 아니라 [[몽골]]과 [[만주]]에서 생활하던 여러 기마민족(騎馬民族)이 세운 [[요나라]]·[[금나라]]·[[원나라]]·[[청나라]] 등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기존에 [[칸 (칭호)|칸]](Khan) 등의 고유한 칭호를 사용하였지만, 중국을 넘볼 정도로 강력해지면 여지없이 칭제건원하여 중국식 황제의 칭호를 채용하였다. 그러다가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하면서 폐지되었다. [[1934년]] [[만주국]]에서 허수아비지만 잠시 부활하기도 하였으나 [[1945년]] 만주국이 멸망하면서 완전히 없어졌다.
 
기원전 220년대에221대에 [[진 시황제]]가 황제의 칭호와 각종 용어를 정립한 이래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자국의 최고 [[군주국가원수]](君主)를 황제라 하였다. 이는 [[한족]]이 건국한 왕조뿐만 아니라 [[몽골]]과 [[만주]]에서 생활하던 여러 기마민족(騎馬民族)이 세운 [[요나라]]·[[금나라]]·[[원나라]]·[[청나라]] 등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기존에 [[칸 (칭호)|칸]](Khan) 등의 고유한 칭호를 사용하였지만, 중국을 넘볼 정도로 강력해지면 여지없이 칭제건원하여 중국식 황제의 칭호를 채용하였다. 그러다가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하면서 폐지되었다. [[1934년]] [[만주국]]에서 허수아비지만 잠시 부활하기도 하였으나 [[1945년]] 만주국이만주국도 멸망하면서 완전히 없어졌다.
 
이와는 별도로 [[당나라]]의 [[당 고종|고종]]은 황제 칭호 대신에 ‘[[천황]]<!--천황(天皇)이라는 용어 자체를 대상으로 한 안내가 필요하므로 '당 고종'이나 '천자'로 링크하지 않고 동음이의 문서인 '천황'으로 링크'-->(天皇)’이라는 칭호를 쓰기도 하였다.<ref>上元元年 ~(중략)~ 八月壬辰,皇帝稱天皇,皇后稱天后。(상원 원년 팔월 임진일(역주:율리우스력 674년 9월 20일), 황제가 천황이라 칭하고 황후를 천후라 칭했다.) 《[[신당서]]》(新唐書) 〈[[:zh:s:新唐書/卷003|본기 제3 고종]]〉</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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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대한제국 고종|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황제를 칭했다. 다만 제국 선포 이전에도 황제국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을 종종 차용하였다. 임의적으로 황제라 불리기도 하였다.
 
[[고구려]]나 [[신라]]는 독자 [[연호]]를 사용한 때가 있고 [[김춘추]]에게 태종(太宗)이라는 [[묘호]](廟號)를 올리기도 하였다. [[발해]]는 각종 기록에서 독자 연호의 사용과 황상, [[황후]](皇后) 등의 용어가 나타나지만 묘호를 올리지 않고 왕이라황제라 칭하였다칭하지 않았다. <ref>[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2891 정혜공주묘지],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2892 정효공주묘비]. 송기호, 〈용해구역 고분 발굴에서 드러난 발해국의 성격〉, 《고구려발해연구》, 고구려발해학회, 2010</ref>
 
[[고려]]는 묘호를 올렸고, [[고려 태조|태조]]와 [[고려 광종|광종]] 때 약 20년 동안 독자 연호를 사용한 적이 있다.<ref>《[[고려사]]》1권 세가 제1 태조 원년, 2권 세가 제2 광종 원년</ref> [[수도]] [[개경]]을 황도(皇都)라 부르고<ref>《고려사》2권 세가 제2 광종 11년</ref> [[원구단]]에서 [[하늘]]에 제사 지냈으며<ref>《고려사》59권 지 제13 길례</ref> 임의로 황제라 부른 기록들이 있다.<ref>[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3113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975년)].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3117 〈태평2년명마애약사불좌상〉(977년)]</ref> 이렇듯 고려는 외부로는 중국에 칭신하고 내부적으로는 황제국체제를 지향했다.<ref>김기덕, 〈고려의 제왕제와 황제국체제〉, 《국사관논총》vol.78, 국사편찬위원회, 1997</ref> 다만 공식 직함은 내부적으로도 황제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ref>박재우, 〈고려 군주의 국제적 위상〉, 《한국사학보》vol.20, 고려사학회, 2005</ref> 황제보다는 왕,<ref>[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1584 〈고미현서원종〉(963년)],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3222 〈운문사원응국사비〉(1147년)]</ref> 왕태후, 왕후, 왕태자라는 말을 절대적으로 더 많이 썼고<ref>[http://db.history.go.kr/KOREA/search/searchResult.do?sort=levelId&dir=ASC&limit=20&page=1&codeIds=PERIOD-0-3&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7%8E%8B&searchKeywordConjunction=AND 《고려사》]</ref> [[시호]]도 대왕(大王)으로 올렸다. 광종조차광종도 독자연호를 쓴 시기는 약 7년 뿐으로 [[후주]]나 [[송나라]]의 연호를 받아들였으며<ref>《고려사》2권 세가 제2 광종 2년, 광종 14년</ref> 스스로도 왕이라고황제라는 표현은 쓰지 일컬었다않았다.<ref>〈대반야바라밀다경 사경 권수〉(952년), 이기백 편저, 《한국상대고문서자료집성》, 일지사, 1987</ref>
 
[[원나라]]의 [[원 간섭기|부마국]]이 된 [[충렬왕]] 이후로는 관제와 왕실의 호칭을 모두 제후국의 규격으로 격하되었고, [[조선]] 시대에도 이를 계승하였다. 그러면서도 조종(祖宗)의 묘호를 회복하고 [[왕]]과 왕비의 사후 대왕과 [[왕후]](后)의 존호(尊號)를 올렸다. [[1894년]] [[청나라]]의 연호를 완전히 폐지하고, 군주를 [[대군주]]폐하(大君主陛下)로 격상해 불렀다.<ref>《[[조선왕조실록]]》 고종 31년 12월 17일</ref>
[[고려]]는 묘호를 올렸고, [[고려 태조|태조]]와 [[고려 광종|광종]] 때 약 20년 동안 독자 연호를 사용한 적이 있다.<ref>《[[고려사]]》1권 세가 제1 태조 원년, 2권 세가 제2 광종 원년</ref> [[수도]] [[개경]]을 황도(皇都)라 부르고<ref>《고려사》2권 세가 제2 광종 11년</ref> [[원구단]]에서 [[하늘]]에 제사 지냈으며<ref>《고려사》59권 지 제13 길례</ref> 임의로 황제라 부른 기록들이 있다.<ref>[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3113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975년)].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3117 〈태평2년명마애약사불좌상〉(977년)]</ref> 이렇듯 고려는 외부로는 중국에 칭신하고 내부적으로는 황제국체제를 지향했다.<ref>김기덕, 〈고려의 제왕제와 황제국체제〉, 《국사관논총》vol.78, 국사편찬위원회, 1997</ref> 다만 공식 직함은 내부적으로도 황제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ref>박재우, 〈고려 군주의 국제적 위상〉, 《한국사학보》vol.20, 고려사학회, 2005</ref> 황제보다는 왕,<ref>[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1584 〈고미현서원종〉(963년)],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3222 〈운문사원응국사비〉(1147년)]</ref> 왕태후, 왕후, 왕태자라는 말을 절대적으로 더 많이 썼고<ref>[http://db.history.go.kr/KOREA/search/searchResult.do?sort=levelId&dir=ASC&limit=20&page=1&codeIds=PERIOD-0-3&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7%8E%8B&searchKeywordConjunction=AND 《고려사》]</ref> [[시호]]도 대왕(大王)으로 올렸다. 광종조차 독자연호를 쓴 시기는 약 7년 뿐으로 [[후주]]나 [[송나라]]의 연호를 받아들였으며<ref>《고려사》2권 세가 제2 광종 2년, 광종 14년</ref> 스스로도 왕이라고 일컬었다.<ref>〈대반야바라밀다경 사경 권수〉(952년), 이기백 편저, 《한국상대고문서자료집성》, 일지사, 1987</ref>
 
[[원나라]]의 [[원 간섭기|부마국]]이 된 [[충렬왕]] 이후로는 관제와 왕실의 호칭을 모두 제후국의 규격에 맞추었고 [[조선]] 시대에도 이를 계승하였다. 그러면서도 조종(祖宗)의 묘호를 회복하고 [[국왕]]과 왕비의 사후 대왕과 [[왕후|후]](后)의 존호(尊號)를 올렸다. [[1894년]] [[청나라]]의 연호를 완전히 폐지하고, 군주를 [[대군주]]폐하(大君主陛下)로 격상해 불렀다.<ref>《[[조선왕조실록]]》 고종 31년 12월 17일</ref> [[1897년]] [[대한제국 고종|고종]]은 [[광무 (연호)|광무]](光武)로 연호를 바꾸고 원구단에서 [[한국의 황제에황제]]에 올라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정작 내실이 부족하여 [[열강]]의 내정간섭은 심화됐고, 결국 [[1910년]] [[일본 제국]]과의 [[한일 합병]]으로 제정폐지된다제정이 폐지된다.
 
=== 일본 ===
{{본문|일본 천황}}<!--천황 항목에 구체적 내용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개괄적인 내용만 기재-->
[[일본]]은 [[야마토 시대]]부터 [[치천하대왕|대왕]](大王)의 칭호를 사용했고 대략 [[7세기]]에 [[일본 천황|천황]]({{lang|ja|天皇}})으로 개칭하였다.<ref>本位田菊士, 〈‘大王’から‘天皇’へ--古代君主号の成立をめぐって〉, 《ヒストリア》89, 大阪歴史学会, 1980</ref> [[무로마치 시대]]에는 [[쇼군]]이 [[일본 국왕]]으로 [[책봉]]받기도 하였다.<ref>《선린국보기》(善隣國寶記)</ref> [[메이지 유신]] 이후 [[왕정복고]]가 이루어지면서 [[막부]]가 폐지되고 천황 중심의 근대적 독일식 내각제를 채택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한 후로도 천황제는 존속하였고, [[21세기]] 현재 제호(帝號)를 유지하고 국제적으로 'Emperor (황제)'가 통용 표기되는 유일한 [[나라]]이다.<ref>{{언어링크|ja|en}} [http://www.kunaicho.go.jp/ 일본 궁내청 사이트]</ref>
 
=== 베트남 ===
[[베트남]]은 대외적으로는 중국 천자의중국의 책봉을 받아 황제의 칭호를 대외적으로 쓰지 않았지만 대내적으로는 ‘황제’를'황제’를 칭하고 독자적인 [[묘호]]와 [[연호]]를 사용하였다. 최후의 [[왕조]]인 [[응우옌 왕조]]는 [[19세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편입되어 [[식민지]]가 되었어도 명목만은명목상 황실은 유지하다가 [[1945년]] 완전히 막을 내렸다.
 
== 유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