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산 김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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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탁(金逴) : 병조참의
* 김중곤(金仲坤) : 절충장군
* 김광좌(金匡佐. 1466∼1545) : 화의군 김기 현손, 충무위(忠武衛), 증이조참판, 들성에 세거하던 선산 임씨 상장군(上護軍) 임무(林珷)의 사위로 처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들성에 입향
* 김취성(金就成. 1492 ~ 1550) : 조선 전기의 학자, 증이조참판 김광좌의 장자, 자는 성지(成之), 호는 진락당(眞樂堂) 또는 서산(西山), 일찍이 박영(朴英)의 문하에 들어가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을 배워 존심양성(存心養性)의 방법과 관물성찰(觀物省察)의 오묘한 뜻을 터득하고, 무극(無極)과 태극(太極)의 묘용(妙用)을 배워 그 이치를 깨달았다. 한평생을 학문탐구에 몰두하고 일가를 이루었다. 만년에 [[김정국]](金正國)과 [[이언적]](李彦迪)의 추천으로 네 차례나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의학에 대하여 많은 연구를 함으로써 약성(藥性)과 경락(經絡)에 대한 지식이 깊어 병든 사람을 많이 치료하였다. 저서로는 『진락당집』이 있다.
* '''김취문'''(金就文. 1509 ∼ 1570) :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문지(文之), 호는 구암(久菴), 김광좌(金匡佐)의 아들, 어려서부터 형 김취성과 함께 박영(朴英)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워 그 학통을 이었다. [[1537년]](중종 32)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지방 수령으로 전전하다가 사성(司成)이 되었다. 명종 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으며, [[1568년]](선조 1)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뒤 대사간에 이르렀다. 문집으로서는 《구암집》(久庵集)이 전한다. 시호가 정간(貞簡)에서 문간(文簡)으로 바꾸었다.
* 김종무(金宗武. 1548 ~ 1592) : 구암 김취문의 아들, 임진왜란 때 상주 북천전투에서 순국, 이조판서에 추증, 상주 충렬사(忠烈祠)에 제향
* 김천영(金天英) : 김취빈(金就彬)의 손자, [[1610년]](광해군 2) 식년문과에 병과 급제, 성균관 전적
* 김양선(金揚善) : 증이조참판 김광좌(金匡佐)김광좌의 증손자, 조선 후기 문신, 동강 [[김우옹]]의 총애를 받았으며, [[1616년]](광해군 8)에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감찰·형조좌랑을 거쳐 경상도사를 역임
* 김하량(金廈樑) : 여헌 [[장현광]](張顯光)의 문인, [[1632년]](인조 10) 식년문과 병과 급제, 안동부사·판결사·한성부우윤 등을 역임, 예조판서에 추증
* 김원섭(金元燮) : 한성우윤 김하량(金廈樑)의 아들, [[1672년]](현종 1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헌부에 들어갔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실세하자 관직에서 쫓겨났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재집권하자 다시 등용되어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청요직을 두루 거쳐 대사간에 이르렀다. [[1692년]] 대신 [[민정중]](閔鼎重)의 죄를 논하다가 단천으로 유배되었고, 이후 경흥으로 유배지를 옮겨 6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다 [[1699년]] 풀려났으며, [[1710년]] 공주 보문산의 오두막에서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