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 대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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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정정
오자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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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자유」를 존중한다는 이 대학의 설립시 학풍은 이후 현재까지 「자유로운 연구 학풍」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1919년]]에는 학과제가 학부제로 바뀌고 1899년부터 법과대학에 소속되어 있던 정치경제학과가 일본의 대학 가운데 최초로 경제학부로 독립하였다. [[1923년]]에는 교토대학의 상징이 된 시계탑을 포함한 대학 본관 건물이 완성되고 농학부 등의 학부 추가 증설이 이루어졌다. [[1926년]]에는 교토대학 최초의 부설 연구소인 화학연구소가 설치되었다.
 
[[쇼와 시대]]에는 사상의 억압이 강화되었던 당시 세태를 반영하듯 교토대학에서도 사상관련 사건이 잇따른다. [[1928년]] 경제학자인 가와카미카와카미 하지메 교수를 사직시키라는 문부성의 요구를 교수회가 수용, 가와카미카와카미 교수가 대학을 떠났다. 또한 [[1933년]]에는 [[하토야마 이치로]] 문부대신이 법학부 다키카와 유키토키 교수의 형법 이론에 사상문제를 제기해 휴직 처분을 내린 일로 법학부 교직원과 총장이 사표를 제출하였지만 문부성의 압력으로 다키가와를다키카와를 포함한 교직원 7명이 대학을 떠난 이른바 「다키가와다키카와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전시체제의 강화에 수반해 일본 정신사(문학부), 동아 경제정책 원론(경제학부), 항공학·연료 화학(공학부)등의 국책에 따른 강좌가 설치되었고, [[1943년]]에는 문과 학생의 징병 유예가 정지되어 학생이 잇달아 전장으로 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