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 김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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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 김씨'''(義城 金氏)는 [[경상북도]] [[의성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始祖) '''김석'''(金錫)은 [[경순왕]]의 아들로아들이며, [[고려 태조]]의 외손이며외손으로 의성군(義城君)에 봉해졌다.
 
==역사==
시조 '''[[김석]]'''(金錫)은 [[경순왕]]이 [[고려]]에 귀부 후, 맞아들인 [[고려 태조]]의 장녀인 [[낙랑공주 (고려)|낙랑공주]] 왕씨 소생의 아들로, 의성군(義城君)에 책봉되었다고 한다. 후손들이 [[의성군|의성]](義城)을 관향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ref>시조 김석이 의성군 책봉되었다는 점은 시대성을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의성을 본관으로 처음 쓰기 시작한 것인지, 아니면 후대에 이르러 누군가가 김석 계열을 의성 김씨로 쓰게 된 것인지가 불분명한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의성 김씨 뿐 아니라 여러 성씨에게서 다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겠다. 시조 김석으로부터 4세까지의 선계(석-일-홍술-공우)가 불분명하고, 역사서에 의성을 본관으로 처음 쓰기 시작한 것은 5세 김용비(1992에 간행된 대동보에는 9세라 한다)에 이르러서 부터이다. 경자보 중 하나에는 3세 홍술이 빠지고 국-경진-언미-습광으로 이어지는 4대가 첨가되었다. 그러나 구보인 ≪종파보≫는 '착오가 두려워 세계 속에 편입시키지 않는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ref>
 
후손 김공우(金公瑀)대에 와서 크게 번창하였는데, 그의 아들 김용비(金龍庇)·용필(龍弼)·용주(龍珠) 형제대에 이르러 세계가 갈린다. 장자 '''김용비'''(金龍庇)는 [[고려]] 말 [[공민왕]] 때 홍건적의 침입으로 [[안동]]으로 몽진했을 때 의성 일원에서 도적들을 물리치고 민심을 수습한 공으로 추절 보절공신 '의성군'(義城君)에 책봉되었으며, 금자 광록대부(金紫 光祿大夫) 태자 첨사(太子 詹事)를 지냈다. 후손들이 그를 중시조로 삼았다. 차자 '''김용필'''(金龍弼)은 수사공(守司空), 3자 '''김용주'''(金龍珠)는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고 분적되었다역임하였다.
후손들이 그를 중시조로 삼았다.
고 분적되었다.
 
장자 태자첨사(太子詹事) '김용비'(金龍庇)의 후손으로는계에서 조선 전기 무신 맹암(孟巖) 김영렬(金英烈), 무신 남파(南坡) 김광부(金光富), 무신 문절(文節) 김용초(金用超), 조선 전기 문신 괴정(槐亭) 김숙검(金叔儉), 조선 중기 문신 의병장 오봉(鰲峯) 김제민(金齊閔), 학봉(鶴峰) [[김성일 (1538년)|김성일]](金誠一), 칠봉(七峯) 김희삼(金希參), 개암(開岩) 김우굉(金宇宏),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태천(苔川) 김지수(金地粹), 조선말 유학자 김흥락(金興洛)과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김창숙]](金昌淑)등이 배출되었다.
 
차자 수사공(守司空) '김용필'(金龍弼)계애서는 후손으로는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문하생으로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와 쌍벽을 이룬 대유학자대제학 모재(慕齋) [[김안국]]{{·}} 사재(思齋) [[김정국 (1485년)|김정국]] 형제 등이 배출되었다.
 
=== 시조에 대해 ===
조선 후기 [[1784년]] 개성 어느 산기슭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는 《김은열 묘지명》에 [[경순왕]]의 5자가 '''김중석'''(金重錫)이라 한다. 이후 [[경주 김씨]] 일문 족보류에 이름이 등재되기 시작하였는데, 족보에 옮기는 과정에 '중석'(重錫)을 '''석'''(錫)으로 개명(改名)하고, [[경순왕]] 아들들 시호를 작호(作號)하는 등 가필(加筆)을 심하게 하였다. 또한 '중석'(重錫) 또는 '석'(錫)를 비롯한 《김은열 묘지명》에 등장하는 [[경순왕]]의 8자들의 이름은 《고려사》 등의 문헌(文獻)은정사은 물론이고, 그 어떤 금석문(金石文)에도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후 시조 '''김석'''(金錫)의 출생에 대해 [[경순왕]]의 4자설과 5자설이 대두되었다. 각 문중 고보(古譜) 및 《의성김씨족보》등에는 [[경순왕]] 4자로 기록되어 있으나, 최근 문헌인 《동국만성보》· 《조선씨족통보》· 《신라김씨 2천년사》· 《신라김씨분파연원도》등에는 5자로 기록하고 있다. 후손들은 선조의 뜻에 따라 4자설을 따르고 있는바 이를 부정할 객관적이고 명확한 증거가 없는 관계로 이는 당연하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