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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하운 시초사건 및 한하운의 투쟁적 면모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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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함경남도]] [[함흥군]] 덕천면 쌍봉리에서 부유한 선비였던 한종규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중국 베이징 대학 농학원(이후 중국 농업 대학)을 졸업한 후 함남도청, 경기도청 등에서 근무하다가 [[나병]]의 재발로 사직하고 고향에서 치료하다가 1948년에 월남, 1949년 제1시집 《한하운 시초(詩抄)》를 간행하여 나병시인으로서이목을 화제를받았으나 낳았다이후 이러한 세간의 주목은 '''"《한하운 시초(詩抄)》" 사건'''이라는 후폭풍으로 돌아오게 된다.

한하운 시초 사건 이후 그는 이어 제2시집 《보리피리》를 간행하고, 1956년 《한하운시전집》을 출간하였다. 1958년 자서전 《나의 슬픈 반생기》, 1960년 자작시 해설집 《황토(黃土) 길》을 냈다. 자신의 천형(天刑)의 병고를 구슬프게 읊은 그의 시는 애조 띤 가락으로 하여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그는 일생동안 끊임없이 나병환자를 위한 투쟁을 진행하였으며, 정부에 의해 나병환자 중심으로 진행되던 '''소록도 간척사업'''이 중단되었을 때는 정부를 비판하기도 하는 등 활동가로서의 면모도 보였다.
 
== 주요 작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