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푸르트 대학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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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공분야의 확대 ===
[[파일:AdornoHorkheimerHabermasbyJeremyJShapiro2.png|섬네일|left왼쪽|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하버마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재단의 자산은 우선 타격을 받았지만 프랑크푸르트 시와 프로이센 정부와의 사이에 채결된 대학협정으로 인해 재정적인 위기에서는 빠져나올 수 있었다. 1918년부터 1932년 사이의 짧은 시기 동안 대학은 크게 꽃 피는 시기를 맞이했다. 우선 대학 이사회 및 프랑크푸르트 시와 출자자의 일가가 참석하는 회의에 의해서 시와 대학 사이의 제도적인 연결이 이루어졌다. 전공 분야가 확대됨과 동시에 중요한 학자들이 차례로 초빙 되었다. 1916년에는 유리우스 치엔이 첫 교육학 교수직을 맡았고, 1919년에는 [[프란츠 오펜하이머]]가 독일에서 처음으로 사회학 교수가 되었으며, 1930년에는 [[카를 만하임]]이 그의 뒤를 이었다. 1920년에는 물리학자 [[프리드리히 데사우어]]가 프랑크푸르트로 옮겨왔고 노벨상 수상자인 [[막스 폰 라우에]]와 [[막스 보른]]도 자연과학부의 설립에 공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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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단형 대학교로의 회귀 ===
[[파일:Campus Westend hoersaal.jpg|섬네일|left왼쪽|베스트엔트 캠퍼스의 중앙강의동]]
2007년 2월 14일, 대학 평의회는 집중적인 청문회를 거듭한 결과, 조건부로 대학을 다시 재단형 대학으로 전환하는 것을 결정했다. 이를 통해 출자자의 전통을 계승하기로 한 것이다. 학교 측에서 예상한 이점은, 무엇보다 출자자와 기여자의 수를 늘릴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 그리고 대학 자치권을 확대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 전환계획은 대학 발전계획의 일환으로 2001년 대학 지도부가 발표한 성명서에 명시되어 있다. 이 성명서에 따르면 “프랑크푸르트 대학교는 2001년 대학발전계획을 통해 폭넓은 학문 분야를 바탕으로, 연구 및 교육에서 최고의 실적을 올려 학문 분야에 있어 선두적인 위치에 서는 것을 목표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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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거 통제}}
 
[[분류:독일의 대학교]]
[[분류:프랑크푸르트 대학교| ]]
[[분류:독일의 대학교]]
[[분류:요한 볼프강 폰 괴테]]
[[분류:헤센주의 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