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모니: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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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석가모니'''(釋迦牟尼{{.cw}}Śākyamuni, [[기원전 624년]]? ~ [[기원전 544년|기원전 544년]]?<ref group="주해"> 생몰연대가 확실하지 않아 여러 설이 있지만, [[세계불교도대회]]에서 이것([[기원전 624년]]? ~ [[기원전 544년|544년]])을 공식 채택하였다. 그 영그[[기원전 563년]] ~ [[기원전 483년|483년]], [[기원전 565년]] ~ [[기원전 485년|485년]], [[기원전 463년]] ~ [[기원전 383년|383년]]설이 있다. </ref>)는 [[불교]]의 교조이다. 석가는 부족명으로 “능하고 어질다”라는 뜻이고, 모니는 “성자”라는 뜻이다. 다른 호칭으로는 '''세존'''{{.cw}}'''석존'''{{.cw}}'''불'''{{.cw}}'''여래''' 등의 [[십호|10가지 존칭]]과 아명인 '''싯다르타 고타마'''가 있으며, 서양에서는 흔히 '''고타마 붓다'''라고 칭한다.
 
[[샤카족]]의 중심지인 [[카필라 왕국]](현재의 [[네팔]])에서 국왕 [[슈도다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인간의 삶이 생로병사가 [[윤회]]하는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자각하고 이를 벗어나기 위해 29세 때 [[출가]]하였다. 처음에는 다른 수행자의 수행법을 따라하거나 [[고행]]을 하였으나 이는 무의미하고 [[중도 (불교)|중도]]가 긴요함을 알았다. [[부다가야]]의 [[보리수 (식물)|보리수]] 밑에서 [[선정]]을 수행하여 35세에 [[깨달음|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고 [[부처]](Buddha, 佛陀)가 되었다. 이후 [[인도]]의 여러 지방을 편력하며, 포교와 교화에 힘썼고, [[쿠시나가라]]에서 80세로 [[입멸]]하였다. 석가모니가 비록 네팔에서 출생 하였지만, 깨달음을 얻은 후 주로 인구와 영토 크기가 네팔에 비해서 절대적으로 큰 인도(인디아) 지역에서 포교활동을 하였기에, 석가모니를 인도인으로 착각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국적을 기준하는 것은 출생지를 근거로 하므로, 석가모니는 엄밀히는 네팔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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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달음 ===
[[파일:Mahabodhitemple.jpg|섬네일|left왼쪽|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은 부다가야에 있는 마하보디 대탑.]]
35세 되는 해의 [[음력 12월 8일|12월 8일]] 이른 새벽([[남방불교]]의 전설에는 [[바이샤카월]]의 [[만월]]이 된 밤)에 드디어 ‘대각(大覺)’을 이루고 생·로·병·사의 본원을 끊어 없애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이것은 어떠한 [[번뇌]]에도 흔들리지 않는 절대 정적(靜寂), 즉 [[열반]]의 세계를 체현(體現)한 것이며, 올바른 자각을 얻어 눈을 뜬 부처가 된 것을 의미했다.
 
=== 포교 ===
[[파일:Five disciples at Sarnath.jpg|섬네일|right오른쪽|350px|싯다르타가 처음으로 설법한 다섯 비구가 법륜에 경의를 표하는 모습]]
우주의 진리를 깨닫고는 보리수 밑에 대좌하여 7일 동안 12연법을 달관하여 모든 의혹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한동안 깨달음의 경지를 혼자 즐기다가 얼마 후 이러한 기쁨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주고자 하였다. 우선 지난 날에 같이 고행하던 5명의 수행자들을 교화하기 위하여 [[바나레스]] 교외의 [[사르나트]](鹿野苑)를 방문하였다. 그들 5명은 고행을 그만둔 석가를 경멸했으나 이내 쾌락과 고행의 양극단을 배제한 [[중도 (불교)|중도]]의 설법에 감화되었다. 이 최초의 설법을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한다. 이로 인해 불타의 제자가 된 5인의 [[비구]](比丘)가 생기면서 [[부처|불(佛)]]·[[법 (불교)|법(法)]]·[[승가|승(僧)]]의 불교 교단이 성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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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멸 ===
[[파일:Paranirvana.JPG|섬네일|right오른쪽|250px|싯다르타의 죽음을 표현한 부조.]]
80세의 고령이 될 때까지 설법을 그치지 않았는데, 파바시에서 받은 [[공양]]이 잘못되어 심한 [[이질]]([[식중독]])을 앓았다. 고령인데다 금식을 자주 했었기에 장이 매우 약한 탓이었다. [[질병|병]]이 위독함을 깨달은 불타는 최후의 목욕을 마치고 [[사라수|사라(沙羅)나무]]의 숲속으로 들어가 북쪽을 바라보고 오른쪽으로 누워 발을 포갠 다음 [[밤 (시간)|밤중]]에 제자들에게 최후의 가르침을 폈다. 이후 쉬지 말고 수행에 임할 것을 유언으로 남기고 조용히 [[쿠시나가라]]에서 [[입멸]]하였다. [[기원전 544년]] [[음력 2월 15일|2월 15일]](남방불교에서는 [[베사카월]]의 만월의 밤)이었다. [[유골]]과 [[사리]]는 왕후, [[귀족]]들이 분배하여 각자의 나라에 가지고 가서 [[탑파]]를 세우고 봉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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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기원전 5세기 철학자]]
[[분류:서유기의 등장인물]]
[[분류:비하르주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