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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기 = [[1582년]] ~ [[1583년]]
| 군주 = [[조선 선조|조선 선조 이연]]
| 본관 = [[덕수 이씨|덕수]](德水)
| 경력 = 문관 겸 [[성리학자]]
| 별명 = [[자 (이름)|자(字)]]는 숙헌(叔獻) <br /> [[호 (이름)|호(號)]]는 율곡(栗谷), 석담(石潭)<ref>[[불교]] [[승려]] 시절에는 [[호 (이름)|아호]]이기도 한 '''석담'''(石潭)이라는 [[법명]]으로 승려 생활</ref>, 우재(愚齋) <br /> [[시호]]는 문성(文成) <br /> [[별명|별칭]]은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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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우자 = 정실 [[곡산 노씨]] 부인 <br /> 측실 김씨 <br />측실 이씨
| 자녀 = 이씨(서녀)
| 부모 = [[이원수 (1501년)|이원수]](부) <br /> [[신사임당]](모) <br /> 권씨 측실(서모)
| 친인척 = 할아버지 이천, 재종조부 [[이기 (1476년)|이기]], [[이행 (조선)|이행]], 종증조부 이의무, 친족척 [[여해 이순신|이순신]], 사돈 [[김장생]]<ref>그의 수제자 중의 한사람이기도 하다.</ref>, 서녀사위 [[김집 (1574년)|김집]]
| 형제 = 누이 이매창, 형 이번, 형 이선,<br />동생 [[이우 (1542년)|이우]]
|웹사이트= [http://www.yulgok.or.kr/ 율곡학회 홈페이지]
}}
'''이이'''(李珥, [[1537년]] [[1월 7일]]([[1536년]] [[음력 12월 26일]]) ~ [[1584년]] [[2월 27일]]([[음력 1월 16일]]))는 [[조선]]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이다. 본관은 [[덕수 이씨|덕수]](德水).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이다. 관직은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서인(西人)의 영수로 추대되었다. [[이언적]], [[이황]], [[송시열]], [[박세채]], [[김집]]과 함께 [[문묘]] 종사와 [[종묘]] 배향을 동시에 이룬 6현 중 하나다.
 
{{유교}}
 
== 개요 ==
아홉 차례의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16세 때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이 죽자 3년간 여묘살이를 한 후, 아버지가 계모 권씨를 들인 뒤 금강산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는데, 이 때문에 훗날 그가 죽은 후에까지도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려다가 환속한 사람'이라고 동인과 남인이 공격하는 빌미가 되었다. [[이준경]]이 죽기 직전 붕당의 폐에 관한 유차를 올리자 '죽음에 이르러 말이 악하다'고 공격하였으며 이후 이준경의 처벌까지 가기도 했다. 그러나 후일 당쟁이 현실화하자 스스로 크게 뉘우치고 [[동인]], [[서인]] 사이의 당쟁 조정을 평생 정치 이념으로 삼았다. 공납(貢納)의 폐단 시정책인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 실시를 주장하고, [[병조]][[판서]]로서 [[여진족]] [[이탕개]]의 침입을 격퇴한 후, 10만 양병설을 주장해 임진왜란을 예언했다는 명성을 얻었다. 붕당을 조정하지 못한 한을 남긴 채 죽었으며, 사후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성혼]], [[송익필]], [[김장생]] 등과 함께실양시발개새끼께 기호 지역이 기반인 [[서인]](西人)의 종주로 추앙된다. 그를 [[문묘]]에 종사하는 문제를 놓고 [[인조반정]] 이후 50년간 논쟁의 대상이 되다가 숙종 때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집권한 후 [[문묘]]에 종사되었다.
 
== 생애 ==
=== 출생과 가계 ===
율곡 이이는 [[1536년]] [[강원도]] [[강릉부]] 죽헌동에 있는 외가인 [[오죽헌]](烏竹軒)에서, 덕수 이씨 통덕랑 [[사헌부]][[감찰]] [[이원수 (1501년)|이원수]]와 평산 신씨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오죽헌 별채에서 태어났는데, 신사임당이 태기를 느끼게 된 계기가 흑룡이 바다에서 하늘로 오르는 꿈이었기 때문에, 나중에 그가 태어난 방은 몽룡실(夢龍室)이라 일렀고, 아이 때의 이름은‘현룡(見龍)’이라 지었다가 뒤에 이(珥)로 바꾸었다. 이후 [[경기도]] [[파주]]에 자리한 본가로 와서 생활하였다.태어났다
 
이이의 아버지 이원수는 [[사헌부]] 감찰, 수운 판관과 [[통덕랑]]을 지냈으며, [[조선 중종|중종]] 때의 형제 정승인 경재 [[이기 (1476년)|이기]], 용재 [[이행 (조선)|이행]]의 5촌 조카였는데, 이기는 [[의정부]][[영의정]]을, 이행은 [[의정부]][[좌의정]]을 각각 지냈다. 또한 종숙(당숙) 이기와 이행은 당대의 실권자들이었고, 그들은 외가쪽으로는 [[생육신]] [[성담수]], [[성담년]]의 조카이고, [[사육신]] [[성삼문]]의 외종조카들이었다. 그러나, 아버지 [[이원수]]는 [[통덕랑]] [[사헌부]][[감찰]]에 이르렀다.
 
벼슬이 낮았던 아버지 이원수는 승진하고자, 일부러 당숙이자 [[김종직]]의 문인이며 글을 잘 썼던 [[이기 (1476년)|이기]]의 문하에 출입했으나, 부인인 [[신사임당]]의 권고로 그만두었다. 야사에 의하면, [[신사임당]]이 남편 [[이원수]]에게 [[이기 (1476년)|이기]]의 집에 출입하다가 화를 당할 것이라고 경고했는데, 과연 [[이기 (1476년)|이기]]는 청렴했고 글도 잘 지었으며 벼슬이 [[의정부]][[영의정]]까지 이르렀지만, [[을사사화]]에 가담한데다 권력을 남용한 탓에 [[조선 명종|명종]] 말엽 관작을 삭탈 당했다.
 
어머니 [[신사임당]]은 학문적 소양이 깊었고, 시문과 서화에 능했다. 또한 어머니 [[신사임당]]은 높은 덕을 지닌 인격자였을 뿐만 아니라, 절개가 굳고 시부모를 잘 섬긴다고 칭송을 받던 인물이었다. 이러한 어머니를 두었던 이이는 어려서 어머니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이런 교육환경 덕에 그는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였다. 그의 외할아버지 진사 신명화(申命和)는 [[조광조]] 등과 가까이 지냈으며, 기묘사화 때의 의리를 지켜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외할아버지 신명화는 아들이 없이 딸만 여럿 두었는데, 딸들에게도 [[유교]], [[성리학]]을 가르치고, [[공자]], [[맹자]], [[주자]]의 도리를 가르쳤다.
 
이원수는 신사임당 외에도 권씨라는 첩을 한명 더 두었다. 서모 권씨는 주모 출신으로 술주정이 심하였는데, [[신사임당]]에게는 근심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사임당이 세상을 떠난 뒤, 권씨는 이이를 괴롭혔으나 그는 원한을 품지 않고 서모를 극진히 모셨다.
 
=== 유년기와 소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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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는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5세 때에 어머니 [[신사임당]]이 병으로 자리에 눕자, 외할아버지의 위패를 모신 사당에 홀로 들어가 매일 1시간 동안 기도를 올릴 정도로 어머니를 아끼는 마음이 컸다. 행방불명이 된 이이를 찾던 가족들은 외조부 [[신명화]]의 사당에 엎드려 어머니를 낫게 해달라는 어린 이이가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는 탄복하였다 한다. 또 11세 때에는 아버지 [[이원수]]가 병으로 자리에 눕자, 이이는 칼끝으로 자기의 팔을 찔러 흘러내리는 피를 아버지의 입에 넣어 드렸다고 한다. 그리고 사당에 들어가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8세 때는 [[화석정]](花石亭)에서 팔세부시(八歲賦詩)를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파일:50000 KRW 2009 ob.jpg|썸네일|왼쪽|210px|5만원권 화폐에 도안된 어머니 [[신사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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塞鴻何處去 / 聲斷暮雲中<br />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 / 저무는 구름 새로 소리 끊겨라.<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63316&PAGE_CD= 과거시험 9번 장원급제, 천재 이이의 교만이었을까? - 오마이뉴스] 2006년 9월 28일자 기사</ref>}}
 
어머니 [[신사임당]]이 자주 병환에 눕자, 이이와 형제들은 지극정성으로 어머니 [[신사임당]]의 병구완을 하였다. 그러나, [[1551년]](명종 6년)에 어머니 [[신사임당]]은 끝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이이는 정신적으로 방황하였는데, 서모 권씨의 술주정과 괴롭힘은 그의 방황을 부추겼다. 그는 외할머니 이씨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어머니의 빈자리를 외할머니에게 의존하였으나, 그마저도 곧 세상을 떠난다.
 
그는 성주목사 [[노경린]]의 딸 [[곡산 노씨]]와 결혼하였고, 김씨 와 이씨 두명의 첩을 두었다. 그중 이씨의 서녀에게서 얻은 딸 이씨는, 이이가 죽은 뒤 그의 제자였던 [[김장생]]의 아들 [[김집 (1574년)|김집]]의 첩으로 출가하였다.
 
=== 청소년기 ===
==== 학문 수학과 친구 ====
[[파일:Huam Baik In-geol.jpg|섬네일|right|140px|스승 [[휴암 백인걸]]<br />(그는 [[조광조]], [[김식]], [[김안국]]의 학통을 다시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에게 전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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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신사임당]]의 오랜 병환과 죽음은 그에게 심적, 정신적 충격을 주었다. 그는 사람이 왜 태어나고 죽는가에 대해 계속 고민하면서 한동안 방황하게 된다. 결국 시묘살이를 마친 뒤 [[금강산]]으로 들어가 승려가 되었고, 그가 뒤에 [[불교]]에 입문했다가 환속한 뒤에도 문제 삼지 않고 받아준 것은 스승 [[백인걸]]과 오랜 친구 [[성혼]]이었다. 그러나 이때의 입산 경력은 그의 생전에도 [[송응개]] 등의 [[동인]](東人)들과 [[허목]], [[윤휴]], [[윤선도]] 등의 [[남인]](南人) 당원들에게 이단 학문에 빠졌다는 이유로 사상공세를 당하는 원인이 된다. 이이가 승려이며 [[불교도]]라는 동인, 남인, 북인계열 [[유학자]](儒學者)들의 [[사상]]공세는 [[1910년]](융희 4년)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도 지속된다.
 
[[조광조]]의 직계 제자였던 그의 스승 [[백인걸]]은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유생들과 청년들을 가르쳤고, 이이는 스승인 [[백인걸]]의 스승이자 자신의 사조(師祖)가 되는 정암 [[조광조]] 조차 급진적이라며 거침없이 비난을 가하기도 했다.만났다. 이이는 그곳에서 이틀간 머물며 [[이황]]과 학문의 여러 가지 문제와 사상을 논하고 시를 짓고 토론하였고, 이황은 그의 재능에 크게 감탄하였다. 비록 견해를 일치시키지 못했지만 그 후 이들은 가끔 편지를 서로 주고받으며 학문에 관한 질의 응답을 나누곤 하였다. 그의 학식과 달변을 높이 산 [[이황]]은 자신의 문인은 아니지만 후생가외라 하기도 하였다.
 
==== 승려 생활과 환속 ====
[[파일:Fall-of-Kuryong-at-GeumGangSan.jpg|섬네일|190px|금강산 구룡연]]
 
묘막에서 독서에 열중하던 이이는 [[불교]] 서적을 읽고 유교와 색다른 학문에 흥미를 느껴 3년상이 끝난 [[1554년]](명종 9) [[금강산]] [[마가연]](摩訶衍)에 들어가 자신의 [[호 (이름)|아호]]이기도 한 '''석담'''(石潭)이라는 [[법명]]으로 승려가 되어 불교를 연구하였다.
 
불도를 닦았는데, 그가 수행하는 중 승려들 간에 생불이 출현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고 한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41968 "금강산이야말로 진짜 부처의 경지" - 오마이뉴스] 2005년 03월 11일자</ref> 그러나 승려생활 내내 인간이 왜 태어나고 왜 죽는가에 대한 그의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했다. 결국 [[불교]]가 유교에 미치지 못한다고 확신하고 입산 1년 만에 [[마가연]]을 떠나 금강산에서 내려와 환속한다.<ref>그러나 동인과 남인은 그가 한때 승려였다는 점을 300년 넘게 비난의 소재로 악용하였다.</ref> 하지만 율곡 이이가 주기론을 말하고 아래의 연비어약 (鳶飛魚躍) 시를 남긴 것은 이미 불교에 대한 공부를 마쳤음을 말한다. 산에서 하산하며 그는 승려에게 이와 같은 시를 남기기도 했다.
 
{{인용문|연비어약 (鳶飛魚躍)<br /><br />
연비어약상하동(鳶飛魚躍上下同) / 솔개 날고 물고기 뛰는 이치 위나 아래나 매 한가지<br />
저반비색역비공(這般非色亦非空) / 이는 색도 아니요 또한 공도 아니라네<br />
등한일소간신세(等閑一笑看身世) / 실없이 한번 웃고 내 신세 살피니<br />
독립사양만목중(獨立斜陽萬木中) / 석양에 나무 빽빽한 수풀 속에 홀로 서 있었네}}
 
불교의 무념 무욕이 그의 기질과는 맞지 않다고 판단, [[1555년]] 20세에 금강산에서 내려와 다시 성리학에 탐독하며 유교의 진리를 통해 현실 문제를 타개하겠다는 다짐을 설파하며 《자경문》(自警文)을 집필하였다. 그러나 그가 한때 [[승려]]로 있었다는 점은 후일 [[동인]]과 [[남인]]에 의해 인신공격의 대상이 된다. 이이가 죽고 2백년이 지난 뒤에도, 근기[[남인]]의 지도자 [[허목]], [[윤휴]], [[윤선도]]는 이율곡을 학자의 탈을 쓴 스님이라고 공격했다.
 
==== 학자 생활과 과거에 급제 ====
[[백인걸]]의 문인이기도 한 이이는 [[이황]]을 선학으로 모시고 존경하기도 하였다. [[1558년]](명종 13) 23살의 이이는 당시 대학자인 58세의 퇴계 [[이황]]을 찾아가서 만났다. 이이는 그곳에서 이틀간 머물며 [[이황]]과 학문의 여러 가지 문제와 사상을 논하고 시를 짓고 토론하였고, 이황은 그의 재능에 크게 감탄하였다. 비록 견해를 일치시키지 못했지만 그 후 이들은 가끔 편지를 서로 주고받으며 학문에 관한 질의 응답을 나누곤 하였다. 그의 학식과 달변을 높이 산 [[이황]]은 자신의 문인은 아니지만 후생가외라 하기도 하였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서신을 통하여 경공부(敬工夫)나 격물(格物)·궁리(窮理)의 문제를 서로 서신을 주고받으며 교류하였다. 그러나 [[이황]]을 방문하여 담론하던 중 이와 기의 문제를 놓고 이황을 논파하려 드는 것을 목격한 [[이황]]의 문도들은 그를 이인(異人)으로 의아하게 보면서도 적개심을 품게 되었는데, 후일 조정에 출사한 [[이황]]의 문도들 중 그를 알아보는 이가 있어 그를 스승 이황을 모욕하려 든 논적으로 규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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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로와 병세 ====
[[1582년]](선조 15년)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가 [[형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로 임명되었다. [[병조판서]]로 있을 때부터 갑자기 과로로 쓰러진 그는 관직을관작을 사퇴하고 요양하게 된다. 하루는 그가 출근 길에 [[현기증]]을 느끼고 주저앉은 것을 놓고도 [[동인]] 측에서는 태도가 불량하다며 비난을 가했다. [[동인]]은 계속 그를 탄핵하고 공격하였다.
 
그는 일단 당쟁의 조절을 위해서 [[서인]]의 영수인 [[심의겸]]을 비판하였고, [[정인홍]]의 [[심의겸]] 탄핵 상소에도 동조하였음에도 [[1583년]](선조 17년) 당쟁을 조장한다는 [[동인]]의 거듭된 탄핵으로 스스로 사직했다가, 같은 해 다시 [[판돈녕부사]]에 임명되고,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다. [[동인]]의 당원 [[송응개]]는 조정에서 이이는 나라를 말아먹은 간신이라고 혹평하였다. [[송응개]]는 이이가 [[불교]] [[승려]]가 환속해서 자기가 최고라고 우기며, 언제는 [[심의겸]]도 좋다, 언제는 [[김효원]]도 좋다고 양비론을 펼치며 위로는 임금을 속이고 아래로는 백성을 속이니, 이이 같은 자야말로 나라를 팔아먹은 간신이 아니냐고 혹평을 가했다. 이이는 자신을 공격하다가 파직되거나 탄핵된 인물들이 자신을 비판한 이유를 꼼꼼히 따져보고, 오히려 자신을 비판한 이들의 석방과 탄원을 요구했다. 그러나 [[송응개]]가 처벌받을 때는 한 장의 탄원서도 써주지 않았다. 결국 당쟁을 조절하려는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고 [[동인]]들에 대한 이이의 미움과 원망, 인간적인 감정은 극에 달하게 되었다. 또한 당쟁 조절 노력에 협조하지 않는 같은 [[서인]] 당원들 일부에게도 인간적인 혐오감과 환멸감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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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5년]](광해군 7년)에 율곡의 애제자 [[김장생]] 등의 공의로 고향 [[파주군|파주]]에 그를 모신 사당 [[자운서원|문성사]](文成祠)가 설립되었다. [[자운서원|문성사]]는 1649년(효종 즉위년) [[조선 효종|효종]]왕이 [[사액]]을 내려 [[자운서원]](慈雲書院)이라 하였다. [[1631년]](인조 8년)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에 이이의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졌다. [[이항복]](李恒福)이 글을 짓고 [[신익성]](申翊聖)이 글씨를 썼으며, [[김상용]](金尙容)이 새겨 넣었다.
 
우계 [[성혼]]과 구봉 [[송익필]]과는 이웃에 사는 절친한 친구였는데 [[조선 인조|인조]] 때 서인이 집권하면서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 종사해야 한다는 여론이 나타났으며 [[1682년]](숙종 8)에는 우계 [[성혼]]과 함께 문묘에 종사되었다. 다시 기사환국으로 출향되었다가 [[갑술환국]]으로 서인들이 집권한 후 다시 문묘에 종사되고 계속 제향되었다. 그가 죽은 후 황해도 백천(白川)에 [[문회서원 (배천군)|문회서원]](文會書院)이 건립되어 그를 제사하였으며, 강원도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 그밖에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 풍덕의 구암서원(龜巖書院), 황주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등 전국 20여 개 서원에 배향 되었다.
 
[[파일:5000 won serieIII obverse.jpeg|섬네일|left|180px|[[1983년]] [[6월 11일]]부터 [[2006년]] [[1월 1일]]까지 사용되던 [[대한민국]]의 5천원권 조폐]]
줄 592 ⟶ 560:
[[분류:조선의 저술가]]
[[분류:조선의 공신]]
[[분류:이순신유교 신자]]
[[분류:강릉시 출신]]
[[분류:지폐의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