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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명 유래 ==
[[파일:0 DanKooKU 1a.jpg|250px|용인 3.1만세운동 기념탑(처인구 원산면원삼면 좌항리, 2011.3.29. 준공, 용인시기념사업회)|left|섬네일]]『세종실록지리지』에 "처인은 본래 수원(水原)에 소속시켜 부곡(部曲)을 삼았었는데, 현종 무오년(1018)에 이미 이 이름이 있었다. 본조 태조 정축년(1397)에 현령을 두었다. [[조선 태종]] 계사년(1413)에 두 현(용구현, 처인현)을 합쳐 용인이라 불렀다."고 하여 이미 고려 시대부터 처인이란 명칭이 있었다가 조선 태종 때 용구현과 합쳐져 용인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처인은 고려 시대부터 조선 초기까지 용인 일부의 옛 지명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본래 시의 서남단에 있는 남사면 일대 지역이었다.
 
『동여도』와 『대동여지도』에는 처인, 『청구도』에는 처인성, 『1872년지방지도』에는 현내면에 처인창(處仁倉)이란 명칭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로 보아 조선 후기까지 처인이란 지명이 유지되어 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96년 용인군이 도농복합시로 승격한 후 2005년 용인시 3개 행정구 중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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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현읍]]은 용인시 3읍5면10동 중의 하나로 본래는 쇄포면(灑布面)이라 하였다. 이는 삼으로 직조한 베와 목화에서 뽑아낸 실로 직조한 무명 천을 잿물에 삶아내고 물에 담궜다가 햇볕에 널어 빛이 바래도록 포쇄하던 곳이라고 한데서 연유한 것이다. 그 후 고려 충신 포은 정몽주 선생의 유해를 [[능원리]]에 안장한 후부터는 “충신을 사모한다.”는 뜻에서 모현(慕賢)으로 개칭하였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묘현(墓賢)이라고 한 기록이 있고, 『용인현읍지』등에는 모현촌면(慕賢村面)으로 기록되어 있다. 1914년 발행된 「군현개정구역표」에는 모현면(慕賢面)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한민국정부 수립 후 「용인군 지명위원회」에서 최종 확정된 것이 오늘의 「모현면(慕賢面)」이다.
 
[[포곡읍]]은 ‘포곡’이란 지명의 유래는 이 지역을 지나는 경안천 주변에 무수히 많은 창포가 자생하고 있어 “창포의 고장”이라 불리기 시작한데서 비롯되었다.<br/>또한 [[이동읍]]은 상동촌면과 하동촌면을 합쳐 二東이다.
 
유방동(柳防洞)은 용인시 유림동에[[유림동]]에 속한 법정동으로 본래 용인현의 수여면(水餘面)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밀유양림(密柳楊林)이 있어서 유곡(柳谷)이라 불리던 마을과 방축동(防築洞)을 합쳐서 유방리라 하였다. 1936년 수여면이 용인면으로 개칭된 이래 용인면(읍)에 속해 있었으나 1996년 3월 1일 용인군이 시로 승격될 때 유림동의 일부가 되었다. 영동고속도로 인터체인지가 있으며 1970년대 조성된 새마을 취락 시범단지가 있었으나 지금은 밀집 주거지로 바뀌었다.
 
고림동(古林洞)은 용인시 유림동에 속한 법정동으로 본래 용인현의 수여면(水餘面)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고진(古陳)과 임원(林院)의 두문자를 취하여 고림리라 하였다. 1936년 수여면이 용인면으로 개칭된 이래 용인면(읍)에 속해 있었으나 1996년 3월 1일 용인군이 시로 승격될 때 유림동의 일부가 되었다. 1970년대 공업지역이 되었고, 비교적 평탄하고 넓은 들녘이 위치하였으나 지금은 주택, 아파트 등 주거지역이 혼재하며 마을 북쪽으로 영동고속도로가 동서로 지나고 있다
 
역북동(驛北洞)은 [[역삼동]] 일부의 행정동 명칭. 본래 용인현 수여면 지역이였 는데 1914년 4월1일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금령역의 역동(驛洞)과 북동(北洞)을 합쳐서「역북리」라하여 용인면(읍)의 일부가 되었으나 1996년3월1일 용 인군이 시로 승격될 때 역삼동으로 편입되었음. 자연마을로 관곡, 구성, 낙 은, 신대, 신성, 중간동 등의 소지명이 있다.
 
삼가동(三街洞)은 역삼동 지역의 일부인데 본래는 용인읍 지역으로 [[1996년]] [[3월 1일]] 용인군이 시로 승격되면서 역북리와 삼가리를 합쳐 “역삼동”이라 하였다. 삼가동 서쪽에서 구성 초당곡으로 넘어가는 길 즉, 용인정신병원쪽으로 넘어가는 작은 메주고개로 가는 세갈래 길이 있어서 세거리, 삼가리, 삼거동으로 불렸으며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수여면의 서동(西洞)을 합쳐서 삼가리라 하고 용인면의 일부가 되게 하였다. 삼거동, 새터말, 궁촌, 메주고개, 상직동, 주막거리 등 소지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