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바스티앙 (포르투갈):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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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조부 주앙 3세에는 많은 아들이 있었지만, 세바스티앙의 아버지 주앙 마누엘을 포함해 전원이 앞서 사망해 세바스티앙은 아버지 주앙이 죽은 지 18일 뒤 탄생하였다<ref name="zusetsu53">금7 「그림 해설 포르투갈의 역사」, 53 페이지</ref>. 광장에 몰려든 군중에게 왕자의 탄생을 알렸을 때, 군중은 왕자의 탄생에 환희하며 축복하였다<ref name="horupu">금7 「세바스티앙」 「세계 전기 대사전세계편」5권,437-439페이지</ref>. 후아나에게 남아가 탄생하지 않으면, 에스파냐 왕 [[펠리페 2세]]의 아들 [[카를로스 데 아우스트리아 공|돈 카를로스]]에게 포르투갈 왕위가 옮겨질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세바스티앙의 탄생은 국민에게 바람직하여 「대망왕」이라고 애칭되었다<ref name="zusetsu53"/>. 태어난 왕자는 1월 28일 영세하여, 생일의 성인 성 [[세바스티아누스]]를 기념하여 세바스티앙이라고 명명되었다<ref name="horupu"/>. 세바스티앙의 탄생으로부터 4개월 후, 모후 후아나는 약혼시의 결정에 따라 모국 [[에스파냐]]로 돌아갔다<ref name="horupu"/>.
 
[[1557년]]에 주앙 3세가 승하한 후 세바스티앙이 3세의 나이로 즉위, 조모 카타리나가 섭정으로서 세바스티앙을 후견하였다. [[1562년]]으로부터 [[1568년]]까지는 대숙부인 추기경 [[엔히크 1세 (포르투갈 왕)|돈 엔히크]]가 섭정을 맡았다. 1562년에 소집된 [[코르테스 (신분제 의회)|코르테스]]는 세바스티앙에게 결혼을 요청, 백부인 에스파냐 왕 펠리페 2세의 딸 [[이사벨 클라라 에우헤니아]]와의 약혼이 결정되었다<ref name="abe139">아베 「파란만장의 포르투갈사」, 139페이지</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