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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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출신지 = [[대한민국]] [[인천광역시
|생년월일 = {{출생일과 만나이|1958|11|1}}
|사망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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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경문'''(金卿文, [[1958년]] [[
==선수 시절==
===[[OB 베어스]] 시절===
원년 멤버로 입단해 포수로 활약했다. 창단 첫 해인 [[1982년]]
===[[태평양 돌핀스]] 시절===
[[1989년]] [[김성근 (야구인)|김성근]]이 감독으로 부임한 이듬해 [[1990년]] [[김동기 (야구 선수)|김동기]]를 받쳐 줄 백업 포수를 찾던 중 자금 사정이 좋지 않았던 [[OB 베어스]]와의 상황이 맞아 떨어져 현금 트레이드됐으나, [[OB 베어스]] 시절부터 사이가 안 좋았던 [[김성근 (야구인)|김성근]]과 불편한 관계가 계속됐다.<ref>[http://www.sportsseoul.com/news/baseball/pro/071018/2007101872477577000.htm 'KS 격돌' 김성근-김경문 악연의 굴레]{{깨진 링크|url=http://www.sportsseoul.com/news/baseball/pro/071018/2007101872477577000.htm }} - 스포츠서울</ref> 이러한 [[김성근 (야구인)|김성근]]과의 악연은 [[2007년]]
===[[OB 베어스]] 복귀===
결국 [[1991년]]에
==야구선수 은퇴 후==
===[[두산 베어스]] 감독 시절===
[[1992년]]부터
[[2007년]] ~ [[2008년]]에 [[한국시리즈]]에 진출했으나 [[SK 와이번스]]에 밀려 2년 연속 준우승에 그쳤다. [[2011년]] [[6월 13일]] 좋지 않았던 팀 분위기와 성적 부진을 이유로 사령탑을 수석코치 [[김광수 (1959년)|김광수]]에게 넘기고 감독직에서 사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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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하계 올림픽|베이징 올림픽]]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임, 9전 전승으로 우승해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하며 감독 시작 이래 첫 국제 대회 우승을 맛보았다. [[올림픽]]에서의 그의 전술은 '믿음의 야구'라는 평을 받았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03&aid=0002249520& <베이징2008>'믿음야구'김경문, "용병술보다 선수들이 잘 해 줬다"] 《뉴시스》, 2008년 8월 24일</ref>
===[[NC 다이노스]]
====2011년====
[[2011년]] [[8월 31일]] 계약 기간 3년, 총 14억원에 계약하고
====[[2013년 NC 다이노스 시즌|2013년]]====
[[2013년]] [[5월 24일]] [[KIA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역대 9번째 1,000경기 출장을 기록했다.<ref>[http://www.sportsworldi.com/Articles/Sports/BaseBall/Article.asp?aid=20130524004691&subctg1=05&subctg2=00&OutUrl=naver NC, 김경문 감독 1000번째 경기 자축 화력쇼 “꼭 이기겠다고 생각”] - 세계일보</ref> 2013년 처음으로 1군에 합류해 52승 72패 4무, 승률 4할1푼9리로 7위에 오르며 기대 이상의 성적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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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
<br>전 [[두산 베어스]] 소속이었던 [[이혜천]]이 [[2013년]] [[11월 22일]]에 열린 [[2014년 KBO 리그 2차 드래프트|2014년 2차 드래프트]]를 통해 1라운드 지명을 통해 [[NC 다이노스]]로 이적하자 그의 별명인 '달'과, [[이혜천]]의 별명인 '이핵천', '혜르노빌' 등의 별명을 함께
== 통산 기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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