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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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李光洙, {{일본명|香山光郞|かやま みつろう|가야마 미쓰로}}), [[1892년]] [[3월 4일]] [[평안북도]] [[정주군]] ~ [[1950년]] [[10월 25일]])는 [[조선]],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언론인, 소설가, 언론인, 시인, 문학평론가, 작가번역가, 반민족행위자이다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이며, [[조선 목조]]의 장남 [[안원대군]]의 후손이다후손이기도 하다. 사상가,자는 기자보경(寶鏡), 번역가,호는 [[자유주의]] 운동가이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에 [[대한제국|한민족]] 독립 운동에 참여춘원(春園)·고주(孤舟)·외배·올보리·장백산인(長白山人)이며, [[신한청년당]],필명으로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고춘원생, 임정 사료편찬위원회 그리고 [[신한청년당]]의 독립운동지 ''신한청년경서학인(新韓靑年京西學人)''에도, 주필로서노아자닷뫼당백, 참여하였다.Y생, 그는 [[아시아]] 근대 문학과 지성의 태동기에서 [[대한제국|대한]]의 재생과 광복을 꿈꾸고 기획하였으며장백, [[여성 해방]]과 [[자유 연애|자유 연애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언론인 활동으로 일제 강점기에서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조선일보]] 부사장을 지냈고 또한 문학 번역가로도 활동하며 영미권의 작품을 [[한글]]로 번안하여 국내에장백산인 소개하기도등을 했다사용했다.
 
[[일제 강점기]]에 한국 독립 운동에 참여, [[신한청년당]]과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고, 임정 사료편찬위원회 그리고 [[신한청년당]]의 독립운동지 신한청년(新韓靑年)에도 주필로서 참여하였다. 그는 [[자유주의]] 운동가이기도 했으며, 아시아 근대 문학과 지성의 태동기에 [[여성 해방]]과 [[동성애]], [[자유 연애|자유 연애론]] 등 진보적 주장을 펴기도 했다. 언론인 활동으로 일제 강점기에서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조선일보]] 부사장을 지냈고 또한 문학 번역가로도 활동하며 영미권의 작품을 한국어로 번안하여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다. [[순한글]]체 소설을 쓰는 등 소설 문학의 새로운 역사를 개척하기도 한 인물로 평가되며, 소설가로는 구한 말과 [[일제 강점기]] 시대 동안 '만인의 연인'이라는 별명과 함께 청소년 남녀 문인들의 우상이었고, [[최남선]], [[홍명희]]와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대표되었던 인물이었다.
[[1909년]] 첫 작품 [[사랑인가]]를 발표한 이후 [[일본]] 유학 중에 소설과 시, 논설 등을 발표하였고, 귀국 후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망명, [[1919년]] [[도쿄]](東京)의 조선인 유학생의 [[2·8 독립 선언]]을 주도했으며, [[2·8 독립 선언서]]를 기초한 후 [[3·1 운동]] 전후 [[상하이]]로 건너가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가하고 그후 독립운동지 ''신한청년'' 등에서 주필을 역임하였다. 또한 임시정부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대한제국의 독립의 정당성과 의지를 세계에 알리는데 노력했다. 또한 임시정부에서 발간하는 기관지인 《독립신문사》 사장을 맡아 활동했다.
 
[[1909년]] 첫 작품 [[사랑인가]]를 발표한 이후 일본 유학 중에 소설과 시, 논설 등을 발표하였고, 귀국 후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망명, 1919년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의 [[2·8 독립 선언]]을 주도했으며, [[2·8 독립 선언서]]를 기초한 후 [[3·1 운동]] 전후 [[상하이]]로 건너가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가하고 그후 독립운동지 '한청년 등에서 주필을 역임하였다. 또한 임시정부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대한제국의 독립의 정당성과 의지를 세계에 알리는데 노력했다. 또한 임시정부에서 발간하는 기관지인 《독립신문사》 사장을 맡아 활동했다. 하지만 허영숙이 상하이로 찾아와 귀국을 종용하자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접고 1921년 3월 귀국하여 허영숙과[[허영숙]]과 결혼하였다. 종학원에서 철학, 윤리, 심리, 종교 등을 강의했고 경성학교와 경신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잡지 《개벽》에 《소년에게》를 발표하여 출판법위반으로 입건되었다가 석방되었으며 1922년 5월 개벽지(誌)에개벽지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여 우리민족이'도덕적 쇠퇴한타락'이 것은[[한민족]] 도덕적쇠퇴의 타락원인이라며 때문이라고 했다비판했다. 1923년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편집국장을 지내고, 1933년 《조선일보》 부사장을 거치는 등 언론계에서 활약하면서 《재생(再生)》, 《마의태자(麻衣太子)》, 《단종애사(端宗哀史)》, 《흙》 등 많은 작품을 쓰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해서 전개하였다. 1937년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반 년 만에 병보석되었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인 친일 행위로 기울어져 1939년에는 친일어용단체인 [[조선문인협회]](朝鮮文人協會) 회장이 되었으며 같은 달 20일 조선문인협회 회장으로 협회 주체 전선(戰線) 병사 위문대·위문문 보내기 행사를 주도하였다. 1940년 2월 15일자 『매일신보』에 「국민문학의 의의」를 게재하고 [[황민화운동]]을 지지하였으며, 2월 20일자 『매일신보』의 「창씨(創氏)와 나」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향산광랑(香山光郞)으로 바꾼 이유를 밝히고, 일제의 [[창씨개명]] 정책을 지지하기도 하였다. 3월부터 7월까지 『녹기(綠旗)』에 「진정 마음이 만나서야말로」를 연재하였으며, 9월 직접 작사한 노래 「[[지원병 장행가]](壯行歌)」가 경성중앙방송국 제2방송에서 방송되었다. 12월에는 『국민총력』에 지원병훈련소 참관기인 「[[지원병훈련소의 하루]]」를 발표하였고, 황도학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41년 일본어 산문집 『동포에 부침』이 박문서관(博文書館)에서 간행되었다. 8월 임전대책협의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1941년 9월 3∼5일자 『매일신보』에 「반도민중의 애국운동」을 게재해 일본의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지지하였다. 12월 조선임전보국단 전시생활부장으로, 영미타도대강연회에서 ‘사상 함께 영미를 격멸하라’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1942년 5월 조선임전보국단이 주최한 징병제도 연설회에서는 ‘획기적 대선물’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으며, 『신시대』 1942년 4월호 「징병과 여성」을 게재해 징병제 실시를 환영하는 입장을 보였다. 6월 조선문인협회 주최의 ‘일본 군인이 되는 마음가짐’을 듣는 좌담회, 11월 도쿄에서 열린 제1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가하였다. 1943년 4월 조선문인보국회 이사로 선출되었고, 11월 임시특별지원병제도 경성익찬회 종로위원회 실행위원과 연사로 활동하였다. 같은 달 최남선 등과 함께 일본 내 한국인 유학생들의 입대를 권유하는 ‘선배 격려대’에 참여하였다. 1944년 6월 조선문인보국회 평의원, 결전태세즉응(決戰態勢卽應) 재선(在鮮) 문학자 총궐기대회 의장을 맡았다. 8월 적국항복 문인대강연회에서 ‘전쟁과 문학’이란 제목으로 강연을하였으며, 11월 제3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석하였다. 1945년 2월 대화동맹 준비위원 겸 이사, 6월 조선언론보국회 명예회원과 대의당(大義黨) 위원이 되었다.
그러다가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잠시 반년 간 투옥되었었는데, 이후 친일 성향으로 기울어져 친일어용단체인 [[조선문인협회]](朝鮮文人協會) 회장이 되어 전선 병사 위문대·위문문 보내기 행사를 주도하였다. 1940년 2월 15일자 『매일신보』에 「국민문학의 의의」를 게재하고 [[황민화운동]]을 지지하였으며, 2월 20일자 『매일신보』의 「창씨(創氏)와 나」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으로 바꾼 이유를 밝히고, [[창씨개명]] 정책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혔다. 이외에도 「진정 마음이 만나서야말로」, 「지원병 장행가」, 「지원병훈련소의 하루」 등을 발표하고, 일본어 산문집 「동포에 부침」이 박문서관(博文書館)에서 간행되었다. 1941년 9월 『매일신보』에 「반도민중의 애국운동」을 게재해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을 지지하였고, 영미타도대강연회에서 ‘사상 함께 영미를 격멸하라’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특히 일본제국의 징병제를 선전하고 긍정하는 내용의 글과 연설을 한 것이 가장 눈에 띄는데, 그는 1942년 5월 조선임전보국단이 주최한 징병제도 연설회에서는 ‘획기적 대선물’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으며, 『신시대』 1942년 4월호 「징병과 여성」을 게재해 징병제 실시를 환영하는 입장을 보였다. 1943년 11월 임시특별지원병제도 경성익찬회 종로위원회 실행위원으로 활동하였고 같은 달 [[최남선]] 등과 함께 일본 주재의 한국인 유학생들에게 입대를 권유하는 ‘선배 격려대’에 참여하였다. 1944년 결전태세즉응(決戰態勢卽應) 재선(在鮮) 문학자 총궐기대회 의장을 맡았으며, 8월 적국항복 문인대강연회에서 ‘전쟁과 문학’이란 제목으로 강연, 1945년 2월 대화동맹 준비위원 겸 이사, 6월 조선언론보국회 명예회원 및 대의당(大義黨) 위원이 되었다.
 
해방 이후로이후 [[백범일지]]의 교정, 윤문과 [[안창호]]의 일대기 집필을 직접 맡아 주관하기도 했다. [[1949년]] [[반민특위]]에 기소가 제기됐으나 석방되었고, [[1950년]] 6월 [[한국 전쟁]]때는 때에 [[서울]]에 있다가 [[조선인민군|북한 인민군]]에게에 의해 납북되었다. 그간 생사불명이다가 1950년 [[만포시|만포(滿浦)]]에서 병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순한글]]체 소설을 쓰는 등 소설 문학의 새로운 역사를 개척하기도 하였다. 소설가로는 구한 말과 [[일제 강점기]] 시대 동안 '만인의 연인'이라는 별명과 함께 청소년 남녀 문인들의 우상이었고, [[최남선]], [[홍명희]]와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대표되었던 인물이었다. 자는 보경(寶鏡), 호는 춘원(春園)·고주(孤舟)·외배·올보리·장백산인(長白山人)이며, 필명으로 춘원생, 경서학인(京西學人), 노아자닷뫼당백, Y생, 장백, 장백산인 등을 썼다.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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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작품과 강연을 통해 인간은 소중한 존재라는 점과, 여자도 사람이며 여성의 해방을 주장하였다. 여자의 해방은 가정의 집안일에서 해방되는 것이고, 여자의 해방은 [[자유 연애]]로서 이룩할 수 있다고 설파하였다. 이에 [[유교]] 사상가와 [[조선]] 선비들은 [[풍속]]을 해치고 인륜을 어지럽힌다며 비난을 가하였다. 그는 [[성리학]]이 7백년간 [[조선]] 사회에서 허례허식과 위선, 이름 뿐인 도덕과 겉치레만 남겼고, 나만이 옳다는 관점은 [[당쟁]]과 배척의 원인이 되었다고 공격하였다.
 
[[성리학]]자들과 시골 선비들의 비난은 계속되었고, 그들은 그가 유년 시절에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것을 문제삼아 '상놈', 호로자식이라는'호로자식' 등의 극언을 퍼붓는다. 그러나 성리학자들과 시골 선비들의 비방에이에 굴하지 않고 그는 계속 인간은 평등하며, 남녀는 평등하며, 사람이 귀중한 것이라는 견해를 설파하고 다녔다.
 
==== 귀국과 애정 도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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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향과 친일 행적 ===
1937년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반 년 만에 병보석되었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인 친일 행위로 기울어져 1939년에는 친일어용단체인 [[조선문인협회]](朝鮮文人協會) 회장으로 되었으며 같은 달 20일 조선문인협회 회장으로 협회 주체 전선(戰線) 병사 위문대·위문문 보내기 행사를 주도하였다. 1940년 2월 15일자 『매일신보』에 「국민문학의 의의」를 게재하고 [[황민화운동]]을 지지하였으며, 2월 20일자 『매일신보』의 「창씨(創氏)와 나」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으로 바꾼 이유를 밝히고, 일제의 [[창씨개명]] 정책을 지지하기도 하였다.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사건(흥사단 사건)으로 안창호와 함께 경성부에서 체포,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조직원을 불라는 고문을 당했지만 그는 조직원의 이름을 발설하지 않았다. 건강했던 그는 독방에 수감되었고, 안창호와 함께 병 보석으로 출감할 때까지 형무소에서 6개월간 수감, 1938년 초 6개월 만에 병으로 보석되었다.1938년 3월 정신적 스승인 안창호가 사망하자 충격을 받고 실의에 빠졌으며, 이후 조선신궁을 참배하는 등 본격적인 친일행위의 길로 들어섰다.1939년 친일단체인 조선문인협회 회장에 취임하여 <내선일체와 조선문학>을 쓰는 등 조선문학을 일제의 선전도구로 만드는 데 앞장섰다. 1940년 창씨개명이 실시되자 가야마 미쓰오(香山光郞)로 이름을 바꾸면서 “나는 천황의 신민이다. 내 자손도 천황의 신민으로 살 것이다. 이광수라는 씨명으로도 천황의 신민이 못 될 것이 아니다." 라며 기염을 토했다. 1941년 8월 25일 임전대책협의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9월 7일에는 임전대책협의회가 주관한 채권봉공대 종로대에 참가하여 거리에서 '애국채권'을 팔았다. 9월 11일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10월 18일 조선임전보국단 대구지부 설치를 위한 위원으로 파견되었다. 이광수는 1941년 8월엔 중일전쟁, 9월엔 태평양전쟁을 위해서 힘 썼다. 1942년 2월 조선임전보국단 주최 저축강조 전진대강연회 연사로 활약했다. 6월 10일엔 조선문인협회 주최로 부민관에서 열린 '일본 군인이 되는 마음가짐'을 듣는 좌담회에 참석했다. 1943년 징병제 실시가 공표되자 <지원병장행가> <징병제의 감격과 용의> 등을 기고하여 조선청년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1943년 2월 25일부터 8월 3일까지 매일신보사가 주최한 '국민개병가' 현상모집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1943년 11월부터 1944년 1월까지 조선문인보국회가 주관한 “결전소설과 희곡 현상모집”에서 심사위원을 맡았다. 11월 4일부터 7일까지 임시특별지원병제도 경성익찬회 종로위원회 실행위원과 연사로 활동했다. 1943년 11월 8일부터 14일경까지 작가 최남선, 기업인 김연수, 친일파 정치인 이성근(李聖根) 등과 함께 부산항을 출발, 일본에서 학생들에게 전쟁 지원병을 권유하는 '선배격려대원'으로 연설했다. 1943년 11월 24일 일본 도쿄 메이지 대학에서 조선인 전문·대학생들에게 학병에 지원하라는 강연을 했다. 1945년 1월 4일, <모든 것을 바치리>를 낭독했다. 그 내용을 발췌한다.
 
자, 조선의 동포들아 우리들이 있음으로써 이 큰 싸움을 이기게 하자 우리들이 있음으로써 대아세아 건 설을 완수시키자 이럼으로써 비로소 큰 은혜에 보답하여 받듦이 되리라 아아 조선의 동포들아 우리 모든 물건을 바치자 우리 모든 땀을 바치자 우리 모든 피를 바치자 동포야 우리들, 무엇을 아끼랴 내 생명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하지 말지어다 내 생명 그것조차 바쳐 올리자 우리 임금님께, 임금님께
3월부터 7월까지 『녹기(綠旗)』에 「진정 마음이 만나서야말로」를 연재하였으며, 9월 직접 작사한 노래 「[[지원병 장행가]](壯行歌)」가 경성중앙방송국 제2방송에서 방송되었다. 12월에는 『국민총력』에 지원병훈련소 참관기인 「[[지원병훈련소의 하루]]」를 발표하였고, 황도학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41년 일본어 산문집 『동포에 부침』이 박문서관(博文書館)에서 간행되었다. 8월 임전대책협의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1941년 9월 3∼5일자 『매일신보』에 「반도민중의 애국운동」을 게재해 일본의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지지하였다. 12월 조선임전보국단 전시생활부장으로, 영미타도대강연회에서 ‘사상 함께 영미를 격멸하라’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1942년 5월 조선임전보국단이 주최한 징병제도 연설회에서는 ‘획기적 대선물’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으며, 『신시대』 1942년 4월호 「징병과 여성」을 게재해 징병제 실시를 환영하는 입장을 보였다. 6월 조선문인협회 주최의 ‘일본 군인이 되는 마음가짐’을 듣는 좌담회, 11월 도쿄에서 열린 제1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가하였다. 1943년 4월 조선문인보국회 이사로 선출되었고, 11월 임시특별지원병제도 경성익찬회 종로위원회 실행위원과 연사로 활동하였다. 같은 달 최남선 등과 함께 일본 내 한국인 유학생들의 입대를 권유하는 ‘선배 격려대’에 참여하였다. 1944년 6월 조선문인보국회 평의원, 결전태세즉응(決戰態勢卽應) 재선(在鮮) 문학자 총궐기대회 의장을 맡았다. 8월 적국항복 문인대강연회에서 ‘전쟁과 문학’이란 제목으로 강연을하였으며, 11월 제3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석하였다. 1945년 2월 대화동맹 준비위원 겸 이사, 6월 조선언론보국회 명예회원과 대의당(大義黨) 위원이 되었다.
 
=== 총독부 정책에 협력 문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