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와 천황: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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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즉위 전의 삶 ==
=== 출생과 성장 ===
[[파일:Michi-no-miya Hirohito 1902.jpg|섬네일|왼쪽|1살 때의 히로히토. 제국기인전범국기인 [[욱일기전범기]]를 들고 있다(1902년).]]
1901년([[메이지 시대|메이지]] 34년) 4월 29일, [[도쿄]]의 [[아오야마 어소]]에서 당시 요시히토 황태자였던왕자였던 다이쇼 천황의왕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관례를 맡은 이들은 황자에게왕자에게 궁호는 ‘덕을 깨우치는 자’라는 의미를 가진 ‘미치노미야’를, 이름은 [[중국]]의 고서인 《[[상서]]》(尙書)에 등장하는 격언 ‘유내이민녕’(裕乃以民寧)<ref group="주해">“나라가 풍요로우면 백성은 평안하다”는 뜻이다.</ref> 에서 딴 ‘히로히토’(裕仁)를 붙여주었다.<ref>빅스, 43쪽.</ref> 히로히토의 아래로는 1902년에 태어난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 1905년에 태어난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 1915년에 태어난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이 있었다.<ref name="빅스_44">빅스, 44쪽 ~ 45쪽.</ref> 히로히토가 태어나기 전, 메이지 천황과왕과 측근들은 근친혼이 아이의 요절이나 병약한 아이의 출산을 초래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었기 때문에<ref name="빅스_44"/><ref group="주해">요시히토 황태자는왕자는 메이지 천황의왕의 후궁 소생이다. 메이지 천황은왕은 5명의 아내에게서 15명의 아이를 얻었으나 11명은 어린 나이에 죽었으며, 3남 요시히토 황태자는왕자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이었다.</ref> 황족이왕족이 아닌 귀족 가문의 후손으로 [[구조 미치타카]] [[공작 (작위)|공작]]의 넷째 딸인 구조 사다코를 황태자비로왕자비로 간택하기로 결정하였다.<ref name="빅스_44"/> 이들은 시종들을 대동하여 몇 차례 만난 후 1900년 봄에 결혼하였다.<ref name="빅스_44"/>
 
메이지 천황은왕은 요시히토, 황태자비왕자비 사다코의 의견을 물은 끝에 히로히토를 군인이 가르치게 하기로 결정하였다. 히로히토를 교육시킬 후견인이 될 군인은 결혼한 육군·해군 장교여야 했으며 ‘군인적인 모습’을 히로히토에게 가르쳐줄 수 있어야 했다.<ref name="빅스_44"/> 메이지 천황은왕은 [[오야마 이와오]] 제국 육군 [[일본 제국 참모본부|참모총장]]에게 히로히토를 맡기려 했으나 오야마는 이를 사양했다.<ref name="빅스_44"/> 이 때문에 메이지 천황은왕은 옛 [[사쓰마 번]] 출신의 [[번벌]](藩閥)이자 [[일본 제국 해군|해군중장]]과 해군경을 지낸 [[가와무라 스미요시]] [[백작]]에게 히로히토의 양육을 맡기기로 하였다. 가와무라는 [[유학]]을 배웠으며, 황태자비 사다코와는 먼 인척 관계였다.<ref name="빅스_44"/> 히로히토를 맡은 가와무라는 전범 히로히토를 이기적인 인간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귀를 기울일 줄 알며 어떤 어려움도 헤쳐 나갈 수 있는 용기있는 사람으로 기르기로 결심했다고 한다.<ref name="빅스_44"/><ref>가와하라 도시아키 (1983), 《천황전범 히로히토의 쇼와사》, 분게이슌주, 10쪽 ~ 11쪽.</ref><ref name="베르_45">베르, 45쪽.</ref>
 
히로히토는 가와무라가 세상을 떠난 1904년 11월까지 가와무라의 저택에서 지냈으며, 그 후 동생 지치부노미야와 함께 요시히토와 사다코 아래서 자라게 됐다.<ref name="빅스_46">빅스, 46쪽 ~ 47쪽.</ref> 처음에는 [[시즈오카현]] [[누마즈 시]]의 황실 별장에서, 나중에는 아오야마 어소의 황손어전에서 살았다.<ref name="베르_45"/> 히로히토 형제의 직접적인 양육은 요시히토 황태자의 신임 시종장 [[기도 다카마사]]가 맡았다가 나중에 전담 시종과 궁녀들이 그 일을 맡게 됐다.<ref name="빅스_46"/> 히로히토를 돌본 궁녀들 중, 일본의 항복 직전 마지막 총리대신을 지낸 [[스즈키 간타로]]의 부인이 된 아다치 다카는 둘째 지치부노미야와는 달리 히로히토가 조용하고 신중한 아이였다고 평가했다.<ref name="빅스_46"/> 히로히토는 열 살이 될 때까지 아버지 요시히토 황태자와는왕자와는 어소에서 자주 얼굴을 마주했지만 아다치의 말에 따르면 메이지 천황은왕은 히로히토를 비롯한 손자들을 만나는 것을 매우 꺼려했으며 손자들의 생일날에 손자들을 만날 때에도 군복 차림으로 앉아 권위적인 인사치레만 받았다고 한다.<ref name="빅스_46"/> 네 살부터 여덟 살까지 히로히토는 아우들과 함께 [[마차]]를 타고 도쿄의 중심부를 자주 돌았으며, [[러일 전쟁]]의 군사 지도자들이나 메이지 시대의 [[일본 내각|내각]] 관료들이 히로히토가 있는 황손어전을 찾기도 했다.<ref>빅스, 48쪽 ~ 49쪽.</ref>
 
[[파일:Emperor Taisho's sons 1921.jpg|섬네일|다이쇼 천황의왕의 황자들자녀들. (1921년) 왼쪽부터 히로히토,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1908년 봄부터 히로히토는 도쿄 요쓰야에 있는 [[가쿠슈인]]의 초등과에 들어갔다. 메이지 천황은왕은 [[러일 전쟁]]에서 활약했던 육군대장 [[노기 마레스케]]를 제10대 가쿠슈인 원장으로 임명해 히로히토를 비롯한 황손들의왕손들의 교육을 책임지도록 하였다. 노기는 엄격한 군대식 교육과 [[무사도]], [[유학]] 사상, [[선]](禪)을 강조하였으며, 황손들을 엄격하게 대했다.<ref>빅스, 59쪽.</ref> 또 노기는 히로히토의 건강을 고려하여, 교사진들에게 체육 교육과 건강관리에 특히 신경을 쓰도록 하였으며, 노기 자신은 히로히토에게 자신이 미래의 제왕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검소, 근면, 인내, 남자다움, 의무에 대한 헌신 등을 강조했다.<ref name="빅스_60">빅스, 60쪽 ~ 61쪽.</ref> 한편, 1910년에 메이지 천황은왕은 황실 남자들에게 ‘황족신위령’을‘왕족신위령’을 내려 군사 훈련을 받고 군무를 맡도록 강제했지만 어린 히로히토에게 주어진 군사 훈련은 [[승마]] 훈련과 ‘특별히 뽑힌 학우’ 몇 명과 벌이는 전쟁놀이 뿐이었다.<ref name="빅스_60"/> 그런 한편으로 히로히토는 [[일본 궁내청|궁내성]] 장전부(掌典部)의 궁정 귀족으로부터 [[신토]]식 제사 의식을 익혔는데 이는 천황이 신토의 최고 신관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ref name="빅스_60"/>
 
1912년 7월 29일, 메이지 천황이왕이 세상을 떠났다. 뒤를 이어 히로히토의 아버지 요시히토가 천황이왕이 되면서 히로히토는 황태자로왕자로 책봉됐으며, 육군·해군 소위의 직위를 하사받았다.<ref>빅스, 62쪽.</ref> 이와 동시에 히로히토가 머무는 황손어전은왕손어전은 [[동궁어소]]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이 해에 노기는 동궁어소를 찾아 히로히토에게 [[야마가 소코]]가 쓴 《중조사실》과 [[미야케 간란]]이 쓴 《중흥감언》 을 선물한 뒤 자살했다.<ref>빅스, 65쪽.</ref> 노기를 뒤이어 히로히토의 남은 초등과 2년 과정은 러일 전쟁 때 활약한 해군 제독인 [[도고 헤이하치로]]와 해군대령 [[오가사와라 나가나리]] [[자작]]이 가르치게 됐다. 초등과 과정을 마친 히로히토는 어학문소에서 특별히 선발된 다섯 학우와 함께 군사와 일반교양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ref group="주해">이 시기의 일본 평민들은 소학교를 거쳐 5년제 일반 중학교를 다녔다.</ref> 도고는 이 어학문소의 교장을 맡았고, 오가사와라는 어학문소의 교사진을 선발하고 감독했다. 오가사와라는 군인과 [[도쿄 대학|도쿄 제국대학]]을 나온 학계의 권위있는 교수들로 교사진을 꾸렸다.<ref name="빅스_68">빅스, 68쪽 ~ 77쪽.</ref> 군사 교육은 노기의 후임으로 가쿠슈인 원장이 된 [[오사코 나오하루]], 해군대장 [[사토 데쓰타로]], [[독일 제국]]에 유학을 다녀온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육군 소장이었던 [[우가키 가즈시게]]와 [[나라 다케지]]를 비롯한 2명 등이 맡았다.<ref name="빅스_68"/> 이들은 [[러일 전쟁]]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교육을 실시했으며, 히로히토에게 군대에서의 무사도를 강조하고 [[거함거포주의|강력한 대함대를 중심으로]] 한 전투와 백병전을 중시해야 한다고 가르쳤다.<ref name="빅스_68"/> 그런 한편으로 도고와 오가사와라는 히로히토의 어학문소에서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관리했다.<ref name="빅스_68"/>
 
제왕 수업을 받던 시절에 히로히토에게 영향을 준 또 다른 인물로는 [[스기우라 주고]], [[시라토리 구라키치]], [[시미즈 도루]]가 있었다. 영국 유학파 출신으로 [[국수주의]]자였던 스기우라는 히로히토를 가르치면서 일본의 국수주의와 [[제국주의]]를 옹호하고, [[표트르 1세]]와 [[빌헬름 2세]]보다 유능한 측근이 많은 일본의 천황이왕이 더 위대하다고 주장했다.<ref name="빅스_91">빅스, 91쪽.</ref> 또한 스기우라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시혜하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충성하는” 권위주의를 정당화한 반면 사회계약론과 시민의 저항권을 주장한 [[계몽주의]]자 [[장 자크 루소]]에 대해선 “국가와 정부를 저주한다”며 깎아내렸다.<ref name="빅스_91"/> 그뿐만 아니라 스기우라는 “서양인들이 황화<ref group="주해">[[아시아]]계([[황인종]])가 인도·[[유럽]]계([[백인종]])에게 위협을 끼친다는 주장이다.</ref> 를 두려워하는 반면, 우리는 백화를 한탄한다”고 말하면서 통속적 [[사회진화론]]에 입각해 세계를 백인종과 황인종 간의 대립 중심으로 가르쳤다.<ref>빅스, 94쪽.</ref> 한편 독일 유학파 출신인 시라토리는 [[중국]]의 [[요 (군주)|요]], [[순 (군주)|순]], [[우 (하나라)|우]] 신화는 모두 허구라고 비난했으며<ref name="빅스_95">빅스, 95쪽 ~ 101쪽</ref>, 히로히토에게 역사를 가르치면서 일본을 “아시아의 평화를 확보할 유일한 나라이며, [[한국]]을 침략한 것은 [[식민지 근대화론|한국 국민들의 복지를 증진하는데 유익한 것]]”이라고 미화했다.<ref name="빅스_95"/> 마지막으로 시미즈 도루는 히로히토에게 법학 등을 가르치면서 메이지 천황을 ‘완벽한 군주상’으로 포장했다.<ref>빅스, 102쪽 ~ 105쪽.</ref>
 
=== 황태자 생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