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일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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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초기에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승승장구했다. [[7월 28일]] 중국 29군에 대해 총공격을 개시했고, [[7월 30일]]에는 [[베이징]], [[톈진]]을 점령했다. 중화민국 정부군은 전략상 [[화베이]] 지역을 포기하고 주력군을 양자강 유역에 집중시켰다. 장제스는 [[8월 7일]] 국방회의에서 전면항전을 결의시켰고, 12일에는 육해공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8월 13일]], [[일본군]]이 중국 최대 항구 도시인 [[상하이]]에 상륙하여 공격을 시작함으로써 전쟁이 화북 지역에서 화남 지역으로 확대됐다.
 
이와 동시에 9월부터는 일본군이 화북 지방에서 남진을 개시하기 시작한다. 일본군의 화북 지역 공격은 순조로운 편이었으나, [[산서 성]] 지역에서는 강한 저항을 받았다. 9월에 [[린뱌오]]가 이끄는 팔로군 115사단과 [[허룽]]이 지휘하는 120사단이 [[평형관]]에서 일본군 1개 여단을중대를 매복공격해 섬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는 팔로군이 대일본전에서 거둔 최초의 승리였고, [[중국 공산당]]은 이 승리를 크게 선전했다. [[9월 22일]] 공산당이 '정성단결 일치항적 선언'을 발표하고 그 다음날인 23일 장제스가 이 선언을 받아들이는 담화를 발표함으로써 [[제2차 국공합작]]이 완성되었다.
 
10월에는 [[웨이리황]](衛立煌)의 지휘 아래 중앙군과 산서군이 [[일본군]] 제5사단에 맞서 격렬한 전투를 전개했다. 이 전투는 [[화북]]에서 치러진 초기의 전투 가운데 가장 격렬한 것이었다. 이때 [[팔로군]]도 유격부대로 나서서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비행장을 파괴함으로써 국공 양군의 협력이 이루어졌다. 이 전투로 일본군의 화북 지역 점령은 지지부진해졌고, 진격은 1개월 정도 지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