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양위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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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고종실록 및 순종실록 및 승정원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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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양위 사건'''(高宗讓位事件)은 [[1907년]] [[7월 20일19일]] [[대한제국 고종|고종]]이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추궁하는 [[일본 제국|일본]]의 강압에 못이겨 제위를 [[대한제국 순종|순종]]에게 위임했다가 바로 양위한 사건이다.
[[파일:대한매일신보 1907년 7월 19일 호외.jpg|섬네일|300x300픽셀|[[대한제국 고종]]이 [[대한제국 순종]]에게 양위(讓位)함을 호외로 보도한 [[대한매일신보]]]]
[[대한제국 고종|고종]]이 [[만국 평화 회의|헤이그 회의]]에 [[이상설]]과 [[이준 (1859년)|이준]] 등을 보내 밀서를 전달하려 한 사실을 접한 [[일본 제국|일본]]이 [[이토 히로부미]]에게 책임을 추궁했고 ,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 고종|고종]]에게 책임질 것을 요구했다. 당시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은 [[대한제국 고종|고종]]이 책임지고 퇴진하는 것으로 사태를 종결하려 했으나,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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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의 지시를 받은 이완용 내각은 [[7월 6일]] 내각 회의를 열어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고종에게 추궁한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고 곧바로 입궁하여 어전 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송병준]]은 "[[헤이그 밀사 사건]]은 이제야 정치적으로 중대한 문제가 되었고 일본 정부나 이토 히로부미 통감도 격분하고 있으며 이대로 둔다면 어떠한 중대사가 일어날 지 모르니 폐하께서 사직의 안위를 염려한다면 차제에 자결함으로써 사직의 위기를 구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고 협박했다. 송병준은 고종이 안색을 달리하며 다른 대신들의 의견을 물었으나 누구 한 사람 입을 열지 않자, 송병준이 다시 "폐하, 만일 자결하지 못한다면 [[도쿄]]에 가서 일본 천황 폐하에게 사죄하거나 그렇지 못한다면 일전하여 항복한 후 하세가와 대장에게 비는 수밖에 없다"고 거듭 협박하였다.
 
이완용은 조칙이 내려진 19일 곧바로 황제 대리 의식을 거행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의식을 집행해야 할 궁내부 대신 [[박영효]]가 이를 반발해 병을 핑계로 대궐에 나타나지 않음으로서 식을 치룰 수가 없게 된 것이다.<ref name="yun259">윤덕한, 《이완용 평전》 (중심, 2005) 259페이지</ref> 이완용은 자신이 스스로 궁내부대신 임시서리가 되어 7월 20일19일 황제 대리 의식을 강행했다.<ref name="yun259"/> [[대한제국 고종|고종]]은 [[대한제국 순종|순종]]에게 양위하기 직전 [[대한제국 순종|순종]]에게 [[이완용]]의 진언대로 황제 대리 의식을 거행하게 한다. 그리고 [[대한제국 고종|고종]]은 그해 말 양위한다.
 
송병준의 협박과 폭언으로 고종이 자리를 뜨자 그 후 내각은 일치하여 왕위를 황태자에게 넘기도록 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그 날 제3차 어전회의에서 [[이병무]]가 칼로 위협하여, 고종은 하는 수 없이 물러날 결심을 하고 결국 [[7월 20일19일]] 오전 양위식이 거행되었다.<ref name="ReferenceA"/> 양위식은 고종 황제와 순종 황제가 직접하지 않고 두 명의 내관들이 대신 하였다.
 
이후 [[7월 24일]]에는 [[한일신협약|정미 7조약]]이 체결되었다.
 
=== 경과 ===
고종 양위에는 [[이토 히로부미]], [[송병준]] 등의 개입이 있었음에도 처음 [[대한제국 순종|순종]]의 황제 대리청정 논의와 고종 양위 주장을 처음 꺼낸 [[이완용]]에게만 모든 비난의 화살이 집중되었다. [[대한제국 순종|순종]]의 황제 대리 의식이 있던 7월 20일19일 그 시간에 반일 단체인 동우회 회원들이 덕수궁에서 2킬로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이완용의 남대문 밖 중림동 집으로 몰려가 집을 완전히 불살라버렸다.<ref name="yun260">윤덕한, 《이완용 평전》 (중심, 2005) 260페이지</ref> 이 사건으로 가재도구는 말할 것도 없고 고서적 등이 모두 타버려 이완용은 10만원 상당의 재산 피해를 입었다.<ref name="yun260"/>
 
특히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던 조상들의 [[신주]]까지 불 속에서 사라졌다. [[양자]]를 잘못 들인 탓으로 우봉 이씨 조상들의 위패가 수난한 것이다. 이완용 자신이 "조상 신주가 불타버린 것이 일생 중 가장 가슴 아픈 일이었다."고 말할 정도로 이 사건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ref name="yun260"/> 을사조약 전까지만 해도 민중들로부터 가장 욕을 많이 얻어먹은 것은 주무 대신이었던 [[박제순]]이었다. 이완용은 박제순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공격과 비난의 중심에서 다소 벗어나 있었다. 그런데 고종 양위를 계기로 이완용은 완전히 [[매국노]]의 대명사로서 민중들의 저주 대상이 되고 만 것이다.<ref name="yun2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