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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7년]](태종 7년) 3월 [[쓰시마]] 도주는 사신을 파견해 토산물을 헌납하고 납치해 간 포로를 송환하면서 울릉도에 쓰시마 사람을 이주시키어 살게 해서 쓰시마 도주가 다스리게 해 줄 것을 청원했으나, [[조선 태종]]은 이를 거절했다.
 
조선 초기 [[왜구]]의 노략과 탈세를 막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1416년]](태종 16년) 조정은 섬의 주민들을 본토로 이주시키는 [[공도 정책]](空島政策)을 실시하였다. 이듬해 울릉도(당시 이름 무릉도)의 주민 3명을 이주시킨 후 여러 차례 무릉도 일대의 주민을 조선 본토로 이주시켰다. 그 후 섬에 몰래 들어간 조선 사람이 있었지만, 그보다 먼저 빈 섬에 들어간 일본 사람들에게 밀려났다. [[지봉유설]]에 따르면 “임진왜란 이후 사람들이 들어가본 일이 있으나 역시 왜의 분탕질을 당하여 정착하지 못하였다. 근자에 들으니 왜노가 기죽도를 점거했다 하는데, 기죽도라고 혹 말하는 것은 곧 울릉도이다.” [[조선 세종]] 때에 도망한 사람들을 벌한 기록이 다수 남아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강원도]] 삼척도호부 울진현에 속하며, '우산(于山)과 무릉(武陵) 두 섬이 울진 동쪽 바다 한 가운데에 있으며, 두 섬이 서로 거리가 멀지 않아, 맑은 날에는 바라볼 수 있고, 신라 때에 [[우산국]](于山國), 또는 울릉도(鬱陵島)라 불렀다'고 기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