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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경성신문}}
 
[[1897년]] 아들 [[윤보선]]이 태어났다. [[윤보선]]은 후에 [[대한민국]] 제4대 [[대한민국의 대통령|대통령]]이 되었다. [[1898년]] 사촌 형인 [[윤치호]] 등거과등과 함께 경성신문을 창간하여 활동했다.<ref name=autogenerated1>윤치호 일기 - 한 지식인의 내면세계를 통해 본 식민지 시기(윤치호 역사비평사 2002) 189페이지</ref> 한편 그는 30여 명의 대가족을 부양하였으며, 이재와 수완에 능한 점을 눈여겨본 그의 아버지 [[윤영렬]]은 일찍부터 그에게 집안 재정을 맡겼다 한다. 집안의 재정을 맡은 그는 자녀, 동생, 조카 등 친척의 학비를 댔다.
 
윤치소는 단독으로 50만원을 투자하여 경성방직회사를 만들어 광목을 생산하였<ref name="zi49"/> 다. [[1898년]](광무 1년) [[3월 2일]] 사촌 형 [[윤치호]] 등과 함께 [[경성신문]]을 창간하고 고정필진의 한사람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경영난으로 이듬해 [[9월]] [[남궁 억]]이 인수하게 된다. 이때 기업활동에 참여한 경험으로 후일 [[을사조약]] 이후 기업 활동에 전념한다. [[1901년]](광무 4년) [[1월]] [[중추원]][[의관]]에 제수되었으나 [[1905년]](광무 8년) [[을사 보호 조약]]으로 국권이 피탈되자 관직을 사퇴한다. 본래 할아버지 [[윤취동]]의 유산으로 [[아산]]과 [[천안]]의 만석꾼이었다. [[1905년]]부터는 기업 활동에도 이사, 주주 등으로 참여하고, 토지 매입과 함께 성실성, 근면성 등으로 토지를 늘려 대지주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