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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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한민회군(韓民會軍)은 혼춘 지방에 본영을 둔 부대로서 이도구로 이동한 후 [[홍범도]] 휘하에서 청산리 회전에 참가했던 당시의 병력이 5백명이 있었다.<ref name="yungahn108"/> 그러나 약 2백 명 내외가 참전하였다는 설도 있다.<ref name="yungahn109"/>
 
의민단(義民團)은 [[3·1 운동]] 직후 [[로마 가톨릭교회|천주교]]인 의병을 중심으로 조직된 독립군단으로 [[상해 임시정부]]의 파견원 [[왕삼덕]]의 보고에는, 단원 2백 명에 무기도 군총 2백 정으로서, 간부는 방위룡(方渭龍)과 김연군(金演君) 등이며, 그 동안 국민회의 국민군과 연합작전을 수행했다고 되어 있다.<ref name="yungahn110">윤병석, 《간도역사의 연구》(국학자료원, 2006) 110페이지</ref> 그리고 독립군의 장정 때 왕청현 춘화향 알아하의 본영을 떠나 [[홍범도]] 부대에 이어 이도구 방면에 진출한 의민단 독립군은 '창험대'(昌險隊)로 알려졌고, [[홍범도]] 부대와 합류, 청산리 회전에 참가하였다.<ref name="yungahn110"/>
 
[[신민단]]은 [[3·1 운동]] 직후 [[블라디보스톡]]에서 [[기독교]] 신도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독립군 부대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 파견원의 보고에 의하면, 한때 이 [[신민단]]은 병력이 5백명에 달하였고, 지부를 왕청현과 훈춘현에 두어 간도 지방에도 그 세력이 컸었다고 한다.<ref name="yungahn110"/> 그 후 [[신민단]]은 근거지를 왕청현 상석현, 명월구 등지로 옮기면서 활동했고, 간부는 단장 김준근(金準根)을 비롯하여 부단장 박승길(朴承吉), 사령장관 양정하(梁正夏) 등이었다. 홍범도의 연합부대에 편성될 무렵 [[신민단]]의 병력은 2백 명이었으며, 무기로는 군총 160정, 권총 50정, 수류탄 3상자 등을 구비하고 있었다.<ref name="yungahn110"/> [[6월 7일]]의 [[봉오동 전투]]에도 [[이흥수]](李興秀)가 60명을 이끌고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군북로독군부의 연합 독립군에 가담, 승첩을 올렸던 것이다.<ref name="yungahn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