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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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보성군|보성]] 출신<ref>[http://db.history.go.kr/url.jsp?ID=ch_ad_1900_05_03_0020 나철의 출신지]는 전남 보성이지만, 1891년 식년문과에 급제할 당시 그의 거주지는 낙안(樂安 : 지금의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이었고, 1900년 나인영으로 개명할 당시에는 전북 전주에 살았다.</ref><ref>[http://e-gonghun.mpva.go.kr/portal/web/merit/search_merit_view.jsp?manage_no=1624&judge_case_item_cd=196200_SSG00005_1624&keyword= 한편, 그의 독립유공자 포상자 공적조서에는 본적이 전남 순천으로 기재되어 있다. 공훈전자사료관, 포상자 공적조서]{{깨진 링크|url=http://e-gonghun.mpva.go.kr/portal/web/merit/search_merit_view.jsp?manage_no=1624&judge_case_item_cd=196200_SSG00005_1624&keyword= }}</ref>인 그는 일찍이 한학을 공부하였다.
===관직 생활===
문과에 급제하여 부정자(副正字)를 지냈으며,
===항일투쟁===
귀향한 후 [[1904년]]에 [[강진군|강진]]의 [[오기호]], [[부안군|부안]]의 [[이기 (1848년)|이기]], [[최전]](崔顓) 등 호남 출신의 지식인들과 함께 비밀 결사인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였고, 을사조약 직전인 [[1905년]] 6월에는 오기호(吳基鎬), 이기(李沂), [[홍필주]](洪弼周) 등과 [[일본]]에 건너가 동양 평화를
=== 대종교를 통한 구국운동 ===
그 후 나철은 구국운동(救國運動)의 일환으로 민족 종교 운동에 주력해 [[1909년]] [[1월 15일]] [[한성부]]에서 [[대종교]]를 창시했다. 오기호(吳基鎬)등 동지 10명과 함께 서울 재동(齋洞)에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셔 놓고 <단군교 포명서>(檀君敎佈明書)를 공포한 것이 [[단군교]], 즉 [[대종교]]의 시작이다.
1년 뒤 [[대종교]]로 개칭하는 한편(신도수 2만여 명으로 증가), 북간도에 지사를 설치하였다. [[한일 병합 조약]] 이후로는 [[일본 제국|일제]]의 박해를 피해 교단을 [[만주]] 쪽으로 이동했는데, 이때 [[서일]]을 비롯한 대종교인들이 독립운동에 대거 뛰어들었다. [[1914년]]에는 본사를 그 곳으로 옮겨 포교 영역을 만주 일대까지 넓혔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일제는 [[1915년]] [[10월]] <종교통제안>을 공포하여 탄압을 노골화하였다.
===최후===
[[1916년]] [[8월 15일]]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서 한배검([[단군]])에게 [[제천의식]]을 올린 뒤 순명삼조(殉命三條, 한배님께 제천하고, 대종교를 위하고, 한배님을 위하고, 인류를 위해 목숨을 끊는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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