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형 (독립운동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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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형의 동의회 조직 학교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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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중근 의사의 의거 지원===
동의회 산하 의병부대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 국내진공작전을 하는 안중근의 뒤에는 최재형이 있었다. 싼값에 무기를 사서 대한의군을 먹이고 입히는 숙식을 최재형의 집에서 했다. 그만큼 최재형은 군납업을 통해 엄청난 돈을 벌었고 집도 큰 저택이었다. 안중근이 이끄는 대한의군이 신아산전투등 국내진공작전에 연전연승하다고 영산전투에서 참패를 하게 된다. 참패의 원인은 포로를 석방하여 대한의군의 비밀루트가 발각된 때문이었다. 한편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러시아를 압박하여 최재형을 무장해제시킨다. 최재형은 자금난에 문을 닫게된 해조신문을 인수하여 《대동공보》를 발행,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던고취시켰다. 최재형에게안중근은 [[안중근]]다시 의사가의병을 찾아온다일으킬 것을 다짐하며 최재형의 집에서 손가락을 자르는 단지동맹을 한다. 그 후 대동공보 기자증을 가지고 활동하던 안중근은 이토히로부미가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대동공보에서 최재형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 주살을 모의한다. 당시 하얼빈은 중국의 영토였지만 러시아가 조차해서 다스리던 땅이었다. 하얼빈에 이토 히로부미가 오니 최재형은 [[이토 히로부미]] 사살 장소를 [[하얼빈]]으로 정해, 안의사는 최재형의 집에서 권총연습을 한다. 최재형은 안중근에게 권총을 사주고 안의사가 거사 후 [[일본]]이 관할하지 않는 [[러시아]] 법정에서 재판을 받도록 계획하고, 변호사인 미하일로프 주필을 안중근의 변호인으로 준비한다. 하지만 안중근 의사가 [[1910년]] [[일본]] 법정에서 재판을불법재판을 받고 처형되자순국하자, 최재형은 자신이 안중근 의사를 지켜주지 못했다고 자책감을 느껴 안 의사의 부인과 아이들을 보호하였다.
 
이 사건으로 [[연해주]]의 조선인들은 더욱 러시아의 감시를 받게 되었고<ref>당시 러시아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제국에 패해 압박을 받았다. </ref>, 최재형은 [[권업회]]를 창설하여 독립운동을 하던 최재형도하다가 일본의 음모로 간첩으로 몰려 체포되었다. 곧 무혐의 결정으로 석방되었으나, 러시아 정부에서 더 이상 그와 거래를 하지 않음에 따라 경제적 궁핍에 시달려야 했다. 최재형은 전로한족중앙총회 명예회장과 1919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이후 최초 임시정부였던 대한국민의회에서 외교부장을 맡았다. 그 이후 1919년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재무총장에 선임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최재형은 교육가 사업가 독립운동가 언론가 등 다양한 길을 걸으며 오로지 한인들을 위해 살았고 엄청난 돈을 벌어 한인들과 독립운동에 쏟아부었다.
 
1919년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재무총장에 선임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 최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