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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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의 장비 부족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전쟁 초기에는 기초 훈련을 받고 있던 군사들만이 군복과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나머지는 자신들의 옷에 적당히 표장을 하였으며 일부는 자신들의 총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들쭉날쭉이 된 "군복"에는 [[아이모 카얀데르]] 총리의 이름을 따 "카얀데르 모델"이라는 애칭이 붙여졌다. 핀란드군은 적군에게서 탈취한 장비·무기·탄약으로 부족한 장비를 충당하려 노력하였다. 다행히도 핀란드는 러시아에서 독립한 이후에도 소총을 바꾸지 않아 소련군의 소총탄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ref>[[모신-나강 소총]]을 사용했다</ref> 뿐만 아니라 핀란드제 [[수오미 기관단총]]도 사용되었는데, 이에 자극받은 소련이 [[PPSH41 기관단총]]을 개발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한편 분노한 스탈린은 먼저 속죄양을 찾았고, 여기에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원수가 걸려들었다. 1월 어느날 스탈린은 국방장관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원수, 메레츠코프 장군, 니키타 흐루시초프 등을 모스크바 근교에 있는 보로실로프의 저택으로 소환하였다.
이 모임은 그해 겨울이 유별났던 것만큼 이상한 성격의 회동(會同)이었다. 저녁 식사 도중 스탈린은 벌떡 일어나 보로실로프에게 퍼붓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지휘관으로서 부적합한 보로실로프가 핀란드 에 대한 패전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때 참석한 사람들이 놀란 것은 보로실로프가 신랄한 어조로 반박하고 나선 것이다. 그는 "당신(스탈린)은 오로지 당신 자신을 탓해야 합니다. 바로 당신이 소련군의 수구파(守舊派)를 숙청하여 훌륭한 군인들을 모조리 처형하지 않았소..."(1937년 피의 대숙청)하고 외쳤다. 이어 보로실로프는 통돼지 구이가 담긴 쟁반을 집어들어 식탁에 내동댕이쳤다. "내 평생에 그런 폭발은 처음 보았다."흐루시초프는 뒷날 이렇게 회상했다. 더욱 놀란 것은 스탈린이 매우 차분하게 대처했다는 것이다. 스탈린은 그를 직위 해제했으나 처형하지는 않았다.
 
한편 스탈린은 핀란드 진주군 사령관에 세미욘 티모센코를 임명했다. 그는 메레츠코프가 수립한 기본적인 공격안에 대해 의견을 같이 했다. 그러면서 그는 소련병이 겨울 전쟁을 보다 효과적으로 치를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또한 다시는 패배를 맛보지 않도록 전선에 병력을 증강했다. 당초 소련은 54만의 병력으로 핀란드를 공격했으나 현재는 티모센코 휘하에 90만의 병력이 있었다. 소련군 전선 후방에서는 병사들에 대해 공격 전술에 관한 집중적인 훈련이 실시되었다. 또한 핀란드의 기를 꺽기 위해 추가로 2,800문의 각종 포를 전선에 반입, 화력을 크게 강화하는 한편 항공기를 이용한 폭격을 감행했다. 수주일에 걸친 목격은 방위선 후방을 거의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 핀란드군의 사기는 저하되었다.
2얼 1일, 소련군은 강력한 탱크 부대를 앞세워 척후 공격을 카렐리아 지협 전반에 걸쳐 개시, 본 공세에 앞서 핀란드군을 한풀 더 꺽었다. 공격은 조직적으로 행해져, 야포와 공중 지원을 받은 소련 공병들은 핀란드군이 대전차 장애물로 이용해온 콘크리트 구조물을 폭파한 뒤 그로 인해생긴 틈새로 집중 포화를 퍼부었다. 그 다음에는 탱크 부대가 진격하고 대규모 보병부대가 그 뒤를 따랐다. 그러는 동안 폭격기가 핀란드 진지를 폭격했다. 핀란드군이 한 공격 부대를 격퇴하면 또다른 부대가 공격을 가했다. 만네르하임은 "소련군이 이제는 서로 다른 부대와 협동하여 작전을 수행하는 법을 터득했음이 분명하다"라고 말했다.
 
2월 11일, 새로 충원을 받은 티모센코 원수 휘하 부대는 총공격에 나섰다. 이때부터 2주 반 동안 소련은 강력한 공격을 되풀이해 핀란드 방위망을 뜷고 내륙으로 침입해 들어갔다. 핀란드군은 기진맥진하여 눈물을 머금고 후퇴했다. 이때, 핀란드군의 사상자는 5만명에 달해 있었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절망적인 노력의 하나로 전에는 불합격시킨 자도 징집하고, 부상자를 재소집하였으며, 심지어 10대 학생으로 자원 결사대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도움은커녕 방해가 되는 일이 많았다.
봄이 되자 만네르하임 휘하의 장병들은 아직도 국부적으로 반격을 가해 승리해보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으나, 현실적으로 포탄이 거의 동나고,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남자가 전투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 당시의 탈벨라는 이렇게 표현했다. "모든 곳이 위기에 처했다." 핀란드의 방위가 어느 한 모퉁이만 무너지면, 핀란드 전체가 와해될 것이었다. 만네르하임도 이제는 패배의 순간이 다가왔음을 알았다. 핀란드군의 피해는 증가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니 만네르하임은 협상을 통해 전쟁을 종식시킬 것을 건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40년 3월 6일, 핀란드는 평화를 모색하기 위해 대표단을 모스크바로 보냈다.
 
== 외국의 지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