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포병학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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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발발하자 포병학교에서는 교관들을 비상소집하여 최소한의 인원을 남기고 20여명을 관측장교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의정부 방면으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교육생들은 전방 포병부대로 탄약을 수송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특히, 축석령 지구 전투에서 포병학교 교관들은 악조건에서 관측장교로 임무를 수행하면서 전사하였고, 교도대대장이었던 김풍익 소령은 적 전차가 포진지 10m 전방까지 접근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직접조준사격하여 포를 파괴시키고, 적 전차 사격에 의해 전사하였다.<ref>[[포병과 6․25전쟁]],육군본부 군사연구실,육군본부,2006,95~511쪽</ref>
=== 6.25전쟁 이후 포병의 발전 ===
6․25전쟁 이후 포병은 조직을 재정비하였으며, 1970년대에는 미국으로부터 8인치자주곡사포(M110)와 175밀리 자주평사포(M107), 어네스트 존(Honest John)을 도입하여 포병전력을 증강시켰다. 1970년대 후반에는 105밀리 견인곡사포 KH178과 155밀리 견인곡사포 KH179 개발을 성공시켰으며, 1981년에는 자체 개발한 130밀리 다련장 로켓(구룡)을 전력화시켰다. 그리고 1985년부터는 미국과 한국에서 공동생산한 KM109A2(K55)를 야전에 배치하여 한국군 포병의 주력화포로 운용하였다. 1990년대 이후에는 K9 자주포를 개발하였으며 대구경 다련장(MLRS)을 도입하여 전력화하였다. 또 대포병 감시레이더인감시레이다인 AN/TPQ-36/37 표적탐지레이더를표적탐지레이다를 도입하였다.<ref>[[포병무기 변천사]],육군포병학교,육군인쇄창,2011,6-42~6-50쪽</ref>
 
== 지휘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