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와 천황: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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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히토가 즉위한 직후 몇 년 동안 일본은 좌익과 우익의 대립으로 극심한 혼란에 시달렸다. 다이쇼가 죽은 뒤 휴회 상태였던 [[제52차 제국 의회]]는 1927년 1월 18일에 다시 열렸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7011900209201028&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7-01-19&officeId=00020&pageNo=1&printNo=2290&publishType=00020 18일부터 재개된 양원]<!--임의 번역-->, 동아일보, 1927년 1월 19일.</ref> 제국의회에서 쇼와 천황은 궁중 측근들과 함께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다.<ref name="빅스_214">빅스, 214쪽 ~ 218쪽.</ref> 우선 메이지 천황을 경축하여 새 천황 히로히토를 간접적으로 미화하기 위해 메이지 천황이 태어난 날인 11월 3일을 [[문화의 날 (일본)|메이지의 날]]({{llang|ja|明治節}})로 제정하여 3월 3일에 공표하였다.<ref name="빅스_214"/> 그리고 추밀원은 시데하라 외무대신의 대중국 정책을 공격하여 와카쓰키 내각을 총사직하게 했다.<ref name="빅스_214"/><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7041700200101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7-04-17&officeId=00020&pageNo=1&printNo=s1&publishType=00030 와카쓰키 내각 총사직], 동아일보, 1926년 4월 17일.</ref> 그 후, 가와이, 진다, 마키노, [[이치키 기토쿠로]] 등이 천황과 상의해,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새 총리로 세웠다. 다나카의 총리 선임 때부터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가 암살당할 때까지 총리 인선은 궁중 측근을 비롯한 내대신들이 담당하게 되었고 사이온지는 이들의 선택에 재가를 가하는 데 그치게 됐다.<ref name="빅스_214"/> 1927년 4월 20일에 [[다나카 기이치 내각]]이 출범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7042000209201005&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7-04-20&officeId=00020&pageNo=1&printNo=2381&publishType=00020 다나카 내각의 실현과 그 후], 동아일보, 1927년 4월 20일.</ref> 쇼와 천황은 마키노를 통해 다나카 기이치 내각의 각종 정책에 간섭했다.<ref name="빅스_214"/>
쇼와
== 침략 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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