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채보상운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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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과 ==
제일 먼저 국채보상운동을 제창하고 나선 것은 경상도 대구지방의 애국지사들이었다. 1907년 1월 29일 대구의 광문사(廣文社)에서 그 명칭을 대동광문회(大同廣文會)라 개칭키 위한 특별회를 연 뒤 부사장인 서상돈이 국채보상문제를 제의하였다.
1907년 2월 대구 광문사(廣文社)의 명칭을 대동광문회(大同廣文會)라 개칭하는 특별회에서 회원인 서상돈(徐相敦)이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자고 제의, 참석자 전원의 찬성으로 국채보상취지서를 작성하여 발표하면서부터 국채보상운동은 시작된다.
월초순 김광제 서상돈 등은 국채보상 취지문을 작성하여 전국에 반포하면서 전 국민의 동참을 호소하였고, 서울에서 취지문을 맨 처음 보도한 것은 2월 16일자의 제국신문이었다.
대동광문회는 1907년 2월 21일 대국북문 밖 북후정에서 국채보상운동 대구군민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서상돈 등 수 천명의 유지 ·신사들과 시민들이 참석하여 의연금을 내면서 국채보상운동은 시작되었다.<ref>http://www.gukchae.com/Pages/gukchae_0202.aspx</ref>
 
[[국채 보상 운동]]이 전국에서 벌어지자 [[윤웅렬]], [[이상재]], [[유길준]], [[양기탁]] 등 조정의 관료들도 국채 보상 운동에 참여하고, [[윤웅렬]]은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의 제2대 소장에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