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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천황은 요시히토, 황태자비 사다코의 의견을 물은 끝에 히로히토를 군인이 가르치게 하기로 결정하였다. 히로히토를 교육시킬 후견인이 될 군인은 결혼한 육군·해군 장교여야 했으며 ‘군인적인 모습’을 히로히토에게 가르쳐줄 수 있어야 했다.<ref name="빅스_44"/> 메이지 천황은 [[오야마 이와오]] 제국 육군 [[일본 제국 참모본부|참모총장]]에게 히로히토를 맡기려 했으나 오야마는 이를 사양했다.<ref name="빅스_44"/> 이 때문에 메이지 천황은 옛 [[사쓰마 번]] 출신의 [[번벌]](藩閥)이자 [[일본 제국 해군|해군중장]]과 해군경을 지낸 [[가와무라 스미요시]] [[백작]]에게 히로히토의 양육을 맡기기로 하였다. 가와무라는 [[유학]]을 배웠으며, 황태자비 사다코와는 먼 인척 관계였다.<ref name="빅스_44"/> 히로히토를 맡은 가와무라는 히로히토를 이기적인 인간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귀를 기울일 줄 알며 어떤 어려움도 헤쳐 나갈 수 있는 용기있는 사람으로 기르기로 결심했다고 한다.<ref name="빅스_44"/><ref>가와하라 도시아키 (1983), 《천황 히로히토의 쇼와사》, 분게이슌주, 10쪽 ~ 11쪽.</ref><ref name="베르_45">베르, 45쪽.</ref>
 
히로히토는 가와무라가 세상을 떠난 1904년 11월까지 가와무라의 저택에서 지냈으며, 그 후 동생 지치부노미야와 함께 요시히토와 사다코 아래서 자라게 됐다.<ref name="빅스_46">빅스, 46쪽 ~ 47쪽.</ref> 처음에는 [[시즈오카현]] [[누마즈 시누마즈시]]의 황실 별장에서, 나중에는 아오야마 어소의 황손어전에서 살았다.<ref name="베르_45"/> 히로히토 형제의 직접적인 양육은 요시히토 황태자의 신임 시종장 [[기도 다카마사]]가 맡았다가 나중에 전담 시종과 궁녀들이 그 일을 맡게 됐다.<ref name="빅스_46"/> 히로히토를 돌본 궁녀들 중, 일본의 항복 직전 마지막 총리대신을 지낸 [[스즈키 간타로]]의 부인이 된 아다치 다카는 둘째 지치부노미야와는 달리 히로히토가 조용하고 신중한 아이였다고 평가했다.<ref name="빅스_46"/> 히로히토는 열 살이 될 때까지 아버지 요시히토 황태자와는 어소에서 자주 얼굴을 마주했지만 아다치의 말에 따르면 메이지 천황은 히로히토를 비롯한 손자들을 만나는 것을 매우 꺼려했으며 손자들의 생일날에 손자들을 만날 때에도 군복 차림으로 앉아 권위적인 인사치레만 받았다고 한다.<ref name="빅스_46"/> 네 살부터 여덟 살까지 히로히토는 아우들과 함께 [[마차]]를 타고 도쿄의 중심부를 자주 돌았으며, [[러일 전쟁]]의 군사 지도자들이나 메이지 시대의 [[일본 내각|내각]] 관료들이 히로히토가 있는 황손어전을 찾기도 했다.<ref>빅스, 48쪽 ~ 49쪽.</ref>
 
[[파일:Emperor Taisho's sons 1921.jpg|섬네일|다이쇼 천황의 황자들. (1921년) 왼쪽부터 히로히토,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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