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덤 스미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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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파일:Smith -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 1922 - 5231847.tif|섬네일|''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 1922]]
애덤 스미스는 [[스코틀랜드]] 피페의 커크칼디의 세무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일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지만 [[1723년]] [[6월 5일]] 커크칼디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의애덤의 부친은 애덤 스미스가 세례받기 약 6개월 전에 사망했다. 4살 경에 일단의 집시들에게 납치되었지만 그의 삼촌에 의해서 구출되어 모친에게로 돌아왔다. 스미스의 전기 작가인 존 레이는 장난스럽게 애덤 스미스는 별로 쓸 만한 집시가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첨부한다.
 
14살에 [[글래스고 대학교]]에 입학하여 철학자 [[데이비드 흄]]의 친구였던 [[프랜시스 허치슨]]으로부터 윤리철학을 공부하였다. [[1740년]] [[옥스퍼드 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였으나, 옥스퍼드대의 생활은 그의 삶에 큰영향을 끼치지 못하였으며 [[1746년]]에 자퇴하였다. [[1748년]]에 케임스경의 후원하에 에든버러에서 공개강의를 하게 되었고, 강의에 대한 호평이 계기가 되어 1751년 글래스고 대학 논리학 강좌의 교수가 되었다. 1750년경 데이비드 흄을 만났으며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1759년 [[유럽]]에 명성을 떨치게 된 ‘[[도덕감정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을 발표하였다발표했다. 1764년부터 귀족인 타운젠트의 아들을 데리고 가정교사를 하며 유럽여행을 시작한다. 2년에 걸쳐 [[프랑스]] 등지를 여행하며 여러 나라의 행정 조직을 시찰하고 [[중농주의]] 사상가들과의 접촉을 통해 이들의 사상과 이론을 흡수하였다. 귀국후 저술활동에 전념하여 1776년 유명한 <[[국부론]]>을 발표하여, 국가가 여러 경제 활동에 간섭하지 않는 자유 경쟁 상태에서도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사회의 질서가 유지되고 발전된다고 주장하였다. 이 책은 경제학 사상 최초의 체계적 저서로 그 후의 여러 학설의 바탕이 된 고전 중의 고전이다. 1778년 스코틀랜드의 관세 위원이 되고, 1787년 글래스고 대학 학장을 지냈다. 그는 영국 정통파 '경제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윤리학자로도 알려져 있다.
 
스미스는 시장 경제야말로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 모두에게 만족스런 결과를 낳으며, 사회의 자원을 적절하게 배분할 수 있다고 보며,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
“우리가 저녁 식사를 기대할 수 있는 건 푸줏간 주인, 술도가 주인, 빵집 주인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그들이 자기 이익을 챙기려는 생각 덕분이다. 우리는 그들의 박애심이 아니라 자기애에 호소하며, 우리의 필요가 아니라 그들의 이익만을 그들에게 이야기할 뿐이다.”
 
스미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자유로운 시장경제를 통한 자유무역과 노동분업이 왕이나 군주보다는 보통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당시의 중앙계획경제 체제에서는 정치권력이 경제적 지위를 결정하는데 반해 시장경제는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위정자들과 연고 없는 사람들도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 노동가치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