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바스토폴 포위전 (1941년~1942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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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됐을 때 소련의 공격 목표로 크림반도가 들어가 있진 않았다. 도이칠란트군은 [[붉은 군대]] 대부분을 [[드니프르 강]] 서부에서 붕괴시키면서 진군하는 소탕 작전 도중 무혈입성하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6월에 들어서는 소련 공군이 크림반도에서 루마니아의 석유 정제 시설을 폭격하면서 석유 11,000톤을 잃게 되었다. 도이칠란트의 아돌프 히틀러 총통은 크림반도를 "침몰하지 않는 [[항공모함]]"이라고 말하면서 1941년 7월 23일 아돌프 히틀러 총통의 33번째 지침에서 우크라이나와 크림반도 같은 중요한 목표를 점령하라고 명령했다.<ref>Forczyk 2008, p. 6.</ref>
 
[[독일 육군 최고 사령부|도이칠란트 육군 최고사령부]]는 크림반도가 루마니아 석유 시설 공격을 방어하려는 군사상 요처이고 최대한 빨리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아돌프 히틀러 통총은히틀러는 남진하라는 자신의 명령에 대한 장애를 못 견디고 8월 12일에 크림반도를 즉시 점령하라는 말을 반복했다. [[키예프]]에서 [[키예프 전투 (1941년)|거대한 포위전]]이 일어나는 한 달여간, 9월 17일 [[11 군 (독일 국방군)|도이칠란트 제11군]]의 지휘관이 된 [[상급대장]]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지휘를 맡은 지 일주일 후 크림반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치열한 전투 이후 에리히 폰 만슈타인은 소련의 여러 반격을 격퇴하고 붕괴시켰다. 11월 1일에는 크림반도의 주도인 [[심페로폴]]을 점령했고 11월 16일은 크림반도 전체를 일소했다. 케르치가 11월 16일 함락된 후 유일하게 남은 지역은 세바스토폴이었다.<ref>Forczyk 2008, p. 8–9.</ref>
 
소련에게는 다행스럽게도, 1941년 10월 말 소장 [[이반 예피모비치 페트로프]]가 지휘하는 독립 해안군 32,000명이 [[오데사]]에서 치열한 전투 이후 바다를 이용해 세바스토폴로 도착했다. 소장 이반 예피모비치 페트로프는 내륙에서 세바스토폴로 접근하는 곳을 방어하기로 했다. 소장 이반 예피모비치 페트로프는 내륙 지역에 가장 바깥쪽은 항구부터 16km에 떨어져 있는 3개 방어선을 만들어 항구를 향해 전진하는 추축국을 방어하려고 했다. 소련 [[51 군|제51군]]과 흑해 함대를 포함한 소련군은 10월 크림반도에서 패배하고 12월에 탈출하면서 세바스토폴의 주요한 방어군으로 소장 이반 예피모비치가 지휘하는 독립 해안군만 잔류했다. 9월 26일부터 11월 16일 사이 크림반도의 나머지 지역을 도이칠란트군이 점령하면서 [[3 군 (루마니아)|루마니아 제3군]]과 [[11 군 (독일 국방군)|도이칠란트 제11군]]은 세바스토폴 공격을 준비했다. 도이칠란트 제11군은 처음에는 보병 7개 사단으로 전체 전선 중 가장 약했다. 루마니아군은 수만 많았지 제대로 훈련되지 않고 장비도 부족했다. 날씨가 나빠지고 집중호우로 인해 추축국이 불리해지면서 군사 증강이 지연된 10월 중순, 흑해 함대 사령관인 [[부제독]] [[필립 오크탸브르스키]]는 [[노보로시스크]]로 출항하여 병력과 물자를 지원받았다. 12월 17일부터는 날씨가 추축국이 작전을 시작하기 좋을 정도로 나아졌다.<ref>Dear and Foot 2005, p. 775.</ref>
 
== 만슈타인의 '기러기 사냥' 작전 ==
그러나 소련군은 [[크리미아 반도]]에서 또다시 쓰라린 경험을 맛보게 되었다. 1942년 4월 소련군은 [[에리히 폰 만슈타인]] 장군 휘하의 독일군을 공격했다가 적군 역시 강화된 것을 알고 실망했다. 그때 독일군은 전선에 처음 등장한 제22장갑사단, 루마니아 제7군단, 전투기 21개 연대, 시투카 급강하폭격기 다수를 가진 제8항공군 등에 의해 강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소련군의 공세는 잠잠해졌다.
이제 만슈타인은 히틀러의 명령대로 공세를 전개할 수 있게 되었다. 케르치 반도의 소련군 부대를 제거하고 오랜 [[세바스토폴]] 포위전에 종지부를 찍게 될 것으로 보였다. 그리하여 세바스토폴을 점령하고 흑해를 넘어 코카서스 지방의 [[청색 작전]]에도 때맞추어 참가할 수 있을 것이다. 케르치 반도 공격을 위한 준비는 5월 초에 완료되었다. 그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이 작전을 '기러기 사냥' 작전이라 불렀다.
기러기 사냥 작전은 5월 8일 시작되었다. 독일군의 첫 공격은 만슈타인이 계획한 대로 되었다. 그는 공격이 북으로부터 동쪽을 향해 가해지는 것처럼 보이도록 부대를 전개시켰다. 그리고 소련군 방어부대가 북쪽에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 다른 독일군 부대가 흑해 쪽에서 공격용 주정을 타고 곧장 남으로부터 물이 고여 있는 수로로 들어갔다. 기습당한 소련군은 전투태세를 가누지 못했다. 이 공격 직후 독일군 공병은 신속하게 수로에 조립식 교량을 걸었고, 보병이 이 다리를 건너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갔다. 소련군 방어부대는 들기러기가 날아오르듯 달아났다. 만슈타인의 장갑부대가 급히 그들을 추격했다. 이렇게 하여 독일군은 5월 17일까지 17만명의 소련군 포로와 250대의 전차, 1,110문의 대포를 노획했다.
 
기러기 사냥 작전 이후 만슈타인은 케르치 서쪽 250km 지점에 있는 세바스토폴로 병력을 이동시켰다. 그러나 만슈타인은 오랜 경험을 통해 [[세바스토폴]]의 요새에 최후의 공격을 가하는 '철갑상어' 작전이 기러기 작전보다 훨씬 어려우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방어부대 배후에는 흑해 함대가 도사리고 있었으며 세바스토폴 주위에는 3개의 대규모적인 방어선이 있었다. 베를린도 인정했듯이 전진은 "미터 단위"의 격전이 될 것이었다.
1941년 가을에 독일군이 처음으로 이 도시를 공격한 이래 소련군은 이곳을 결사적으로 지켜왔다. "독일군은 세바스토폴을 함락시키기 위해 병사 10만명의 생명을 바쳐야 할 것이다. 만일 그대들에게 그런 희생을 치르도록 강요한다 하더라도 그대들의 희생은 헛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소련군의 I. S. 유마세프 제독은 부하들을 격려했다.
 
== 경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