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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세 ===
==== 후금의 한 ====
누르하치는누르가치는 홍타이지를홍 타이지를 후계자로 지명하지 않고 [[팔기제|팔기]]의 [[버이러]]들과 공동으로 협의하여 국가를 통치하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 사망했다. 홍타이지가홍 타이지가 계승한 국가는 팔기의 연맹체였고, 그것은 8개의 대족이 연합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아버지 누르하치는누르가치는 창업 군주였고 자신이 아들들과 조카들을 팔기의 버이러에 임명했기 때문에 권력과 권위를 자신에게 집중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홍타이지는홍 타이지는 아버지와 같은 창업 군주가 아니었다. 홍타이지는홍 타이지는 자신과 함께 [[후금]]의 최고 권력자였던 [[다이샨]], 아민, 망굴타이의 양해를 받아 [[칸|한]]의 지위를 계승했다.<ref>{{서적 인용|author=이훈|authorlink=|title=만주족 이야기|series=|publisher=너머북스|isbn=9788994606514|page=167}}</ref>
 
천총한은홍 타이지는 아버지처럼 권력을 독점하지 못했고 무형의 권위도 없었다. 천총한은홍 타이지는 즉위한 후에 동로 대정전에서 다른 세 명의 버이러와 함께 의자 네 개에 나란히 착석해서 정무를 집행했다. 명목상 후금의 천총한였으나[[칸|한]]이었으나 실질적으로 한이 네 명 있는 것과 같았다.<ref>{{서적 인용|author=이훈|authorlink=|title=만주족 이야기|series=|publisher=너머북스|isbn=9788994606514|page=167}}</ref>
 
천총한은홍 타이지는 후금의 식량과 물자의 부족을 타개 하기 위하여 [[조선]] 연해의 가도(樓島)에 근거지를 두고 배후를 위협 하던 [[명나라]] 장수 [[모문룡]]을 친다는 명분을 내세워 조선을 침공하였으니 이것이 [[정묘호란]]이다.<ref>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민음사</ref> 이때 천총한은 조선과의 관계를 공식화하고 대명전쟁을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한 목적에서 희생(犧牲)과 맹서(盟誓) 그리고 저주(詛呪)라는 형식을 수반하는 맹약을 강요하여 체결하였고, 이 맹약을 통해 후금은 [[병자호란]] 이전까지 조선의 대외관계를 상당히 제한했다.<ref>남호현, 《朝淸關係의 초기 형성단계에서 ‘盟約’의 역할》, 조선시대사학회</ref>
 
1629년 11월 천총한은홍 타이지는 군대를 이끌고 처음으로 명나라의 영토로 진격했다. 그는 중원의 4개의 도시를 점령하기 위해 [[만리장성]]을 침범했다. 거주민들을 관대하게 다루라는 천총한의홍 타이지의 명령이 무색하게도, 야전 지휘관들은 천안과 영평의 주민들을 살육했다. 그것은 대민관계에 악영향을 미쳤고, 변방민들을 회유하려던 천총한의홍 타이지의 노력에 큰 흠집을 냈다. 천총한은홍 차이지의 죄를 범한 부하들을 공개적인 재판을 통해 처벌했다.<ref>{{서적 인용|author=William T. Rowe|authorlink=|title=하버드 중국사 청 중국 최후의 제국|series=21세기 하버드 중국사 시리즈|publisher=너머북스|isbn=978-89-9460627-9|page=42}}</ref>
 
3년 후인 1631년, 천총한은홍 타이지는 현재의 [[요령성]]의 해안을 따라 견고하게 방어된 [[대릉하]]의 명군의 요새와 무역 도시를 포위했다. 천총한은홍 타이지는 2만 이상의 병력으로 성을 포위했고, [[포르투칼]]에서 갓 들여온 대포로 성을 공격했다. 몇 주간의 전투, 협상, 그리고 지방 지휘관들의 갑작스런 변절 후에 대릉하성은 후금에 함락됐다. 이것은 점차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신흥국으로서는 중요한 승리였다.<ref>{{서적 인용|author=Frederic Wakeman|authorlink=|title=The Great Enterprise|series=|publisher=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isbn=9780520235199|year=1986|page=164~224}}</ref>
 
같은 해에 천총한은홍 타이제는 아민과 망굴타이를 제거하고 다이샨의 전폭족인전폭적인 지지를 끌어내어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그러나 정치적 라이벌을 제거하는 방식으로는 체계적으로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구축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홍 타이지에게 필요한 것은 황제를 중심으로 중앙집권이 이루어지는 중국식 정치 방식이었다.
 
천총한은홍 타이지는 1629년에 문서처리 기구인 빋허이 보오(書房, {{llang|mnc|{{ManchuSibeUnicode|lang=mnc|ᠪᡳᡨᡥᡝᡳ<br />ᠪᠣᠣ}}|Bithei Boo}})를 설립했고 이 기구에 [[한족]] 관료를 상당수 기용했다. 1631년에는 전형적인 중국식 정치제도인 닝군 주르간(六部, {{llang|mnc|{{ManchuSibeUnicode|lang=mnc|ᠨᡳᠩᡤᡠᠨ<br />ᠵᡠᡵᡤᠠᠨ}}|Ninggun Jurgan}})을 설치함으로써 국가 기구를 완비했다. 천총한에게홍 타이지에게 직속된 기구인 닝군 주르간은 국가의 대소사를 논의함으로써, 기존의 팔기의 버이러들이 공동으로 수행하던 국가 통치의 영역을 잠식했다. 닝군 주르간의 업무를 총관한 것은 6명의 버이러였지만, 그들 가운데 아바타이(阿巴泰, ({{llang|mnc|{{ManchuSibeUnicode|lang=mnc|ᠠᠪᠠᡨᠠᡳ}}|Abatai}})만이 천총한의홍 타이지의 형이고 나머지는 모두 천총한의홍 타이지의 아들과 조카였다.<ref>{{서적 인용|author=이훈|authorlink=|title=만주족 이야기|series=|publisher=너머북스|isbn=9788994606514|page=167~168}}</ref>
 
1635년은 후금의 발전이 또 하나의 분수령을 맞은 해였다. 한해 전에 천총한과 상쟁하던 [[차하르]]의 수장이자 몽골의 카간인 [[링단 칸|릭단릭덴 카안]]이 사망한 후, 이 해에 릭단릭덴 카안의 아들 [[에제이]]가 후금에 투항에 온 것이었다. 이로써 후금의 직접 통치하에 들게 된 몽골인의 수가 대폭 증가했고, 후금 통치하에 여진인과 한인 수가 비슷해지자, 삼자가 공존하는 새로운 국가의 모델이 필요하게 되었고 동시에 국가의 핵심 종족인 [[여진족|주션]]({{llang|mnc|{{ManchuSibeUnicode|lang=mnc|ᠵᡠᡧᡝᠨ}}|Jušen}})의 정체성을 고민해야 하는 이중적인 상황이 도래했다.<ref>{{서적 인용|author=이훈|authorlink=|title=만주족 이야기|series=|publisher=너머북스|isbn=9788994606514|page=151~152}}</ref>
 
또한 [[쿠빌라이 카안]] 이래 [[몽골 제국]] [[카안]]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인 '제고지보(制誥之寶)'라는 한자가 새겨져 있는 '대원전국(大元傳國)이라는 이름의 금으로 만든 도장을 손에 넣은 천총한은 이제 몽골 제국의 정통을 계승한 군주를 자처할 수 있었다.<ref>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민음사</ref>
 
1635년 11월 22일, 천총한은홍 타이지는 '주션'이라는 족명을 폐기하고 '만주'를 공식적이고 유일한 족명으로 선포했다.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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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이 날에 한이 말하길, "우리의 나라의 이름은 본래 만주, 하다, [[우라]], [[예허]], 호이파이니라. 그것에 무지한 사람들이 주션이라 한다. 주션이라는 것은 [[시버족|시버]]의 초오 머르건의 후예이니라. 그들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로부터 앞으로 모든 이들은 우리 나라의 본래 이름인 만주라고 부르라. 주션이라고 부르면 죄이다."}}
 
천총한은홍 타이지는 주션이라는 족명을 폐기함으로써 그 이름에 묻어 있는 과거의 상쟁의 기억, 특히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의 상쟁의 기억을 일소하고, '만주'만을 사용함으로써 여진족을 새로운 명칭 아래 하나로 통합하고자 했다.<ref>{{서적 인용|author=이훈|authorlink=|title=만주족 이야기|series=|publisher=너머북스|isbn=9788994606514|page=152}}</ref>
 
==== 청 제국의 군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