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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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이 발생하자 [[청나라]] 상하이 경찰은 [[홍종우]]를 체포하고 김옥균의 사체는 [[일본]]인 와다 엔지로의 요청에 따라 [[일본]]으로 인계하기로 했다. 일본 영사관에 인계된 시신은 일본인 지인과 그의 추종자가 손톱과 발톱을 잘라내 봉지에 담아 유품으로 [[일본]] [[도쿄]]로 보냈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조선 개화파의 존재를 껄끄럽게 여겨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홍종우]]와 김옥균의 사체를 [[청나라]]에게 넘겼고, [[청나라]] 정부는 [[홍종우]]의 범행을 조선인 상호간의 문제라고 하여 다시 조선에 인계하였다.
 
[[파일:Beheaded Kim Okgyun.png|섬네일|right|250px|효수되어 [[한성부]] 저잣거리에양화나루에 내걸린 김옥균의 수급]]
 
[[1894년]](고종 32년) [[4월 27일]] 유해가 선박으로 옮겨졌고, [[4월 28일]] [[조선]]에 도착한 그의 시신은 강화도서울 [[양화진]]에서 공개적으로 능지처참(陵遲處斬)을 당하고, 머리는 저잣거리에 효시된 후 실종되었다사라졌다. 효시(梟示)된 그의 목에는 '모반(謀反) 대역부도(大逆不道) 죄인 옥균(玉均) 당일 양화진두(楊花津頭) 능지처참'이라고 쓰여진 커다란 천이 나부끼고 있었다. 1894년 4월 28일자 [[일본]] [[시사신보]]에는 양화진에서 옥균의 시을 참시하는 광경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인용문2|'''김의 시신을 관에서 끄집어내 땅위에 놓고 절단하기 쉽게 목과 손, 발밑에 나무판자를 깔았다. 목을 자르고 난 다음에 오른쪽 손목 그다음 왼쪽 팔을 잘랐다. 이어 양 발목을 자르고 몸통의 등 쪽에서 칼을 넣어 깊이 한 치 길이 여섯 치 씩 열 세 곳을 잘라 형벌을 마쳤다.'''<br /><br />시신을 조각조각 떼어서 팔도에 보내어 저자거리에 내다 걸게 하고, 목은 대역부도옥균(大逆不道玉均)이라고 커다랗게 쓴 현수막과 함께 양화진 형장에 효수해 놓았다. 이 끔찍한 형벌은 임금(고종)의 이름을 빌려서 민비와 [[민영익]]의 십년을 벼르다 벌인 철저한 복수극이었으리라. 아! 그렇게 조각조각 잘려진 시신은 그 후 어떻게 처리되었을까? 어느 기간동안 저자거리에서 구경거리로 내 보인 다음엔 누군가 조각시신을 다 모아서 장례를 치러도 되는 것인가? 아니면 어떻게 시신을 처리할까?|[[일본]] [[시사신보]] 1894년 4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