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관가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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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이 변한, 진한을 지배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출처없는 글 삭제. 역사왜곡이 심하네요. 가야의 어느 국인지 몇백호인지도 모르는데 30만명이라는 내용들. 금관가야는 종발성 전투에선 멸망하지 않음. 금관가야는 보호령이 아니고 신라의 공격으로 항복함. 거의 소설수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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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금관가야'''(金官伽倻), '''본가야'''(本伽倻)는 [[42년]]부터 [[532년]]까지 존재했던 나라로, [[신라]]에게 멸망하기 전 국명은 '''가락국'''(駕洛國)
== 국명 ==
{{참고|가야#6가야|고령가야|설명=금관가야의 명칭에 관해서는}}
가락국(駕洛國)이라는 이름은 [[고려]]의 삼국유사에 나오는 국명이며 삼국유사 이전에는 금관가야 혹은 구야국, 가야라고 기록되어 있다.
금관가야에 대해 처음 사서에 전하는 이름은 '''[[구야국]]'''(狗邪國) 또는 '''[[구야한국]]'''(狗邪韓國)인데, '''狗'''자의 상고음(上古音)은 '가이'로, '''狗邪'''는 '가이야'나 '가야'로 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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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국 설화 ==
*[[42년]]에 200~300명의 무리가 [[구간 (신화)|
▲*[[42년]]에 200~300명의 무리가 [[구간 (신화)|구간]](9간)과 함께 [[구지봉]]에 모였는데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사람의 목소리가 구지봉에서 들려왔다. 그 소리가 “여기에 사람이 있는가” 라고 하자 사람들은 “네, 저희들이 있습니다." 라고 하자 “그럼 내가 있는 곳은 어디인가”라고 했더니 “구지봉입니다” 라고 다시 말하자 “하늘이 나에게 너희들의 왕이 되라고 명하셔서 이렇게 왔노라 그러니 너희는 지금 내가 시키는 대로 구지가를 부르며 춤을 추어라” 라고 하자 사람들은 기뻐하며 구지가를 불렀더니 하늘에서 자주색 줄이 내려오고 줄 끝에는 황금색 상자가 있었고 그 안에는 6개의 황금 알이 있었다. 그 상자를 귀하게 여겨 12일 동안 [[아도간]]의 집에 놔두었더니 12일 후에 사내아이로 바뀌고 10일이 다시 지나자 사내아이 중 키가 9자, 얼굴은 [[전한 고조]], 눈썹은 [[요 (군주)|요]] 임금, 눈동자는 [[순 (군주)|순]] 임금 같은 사내아이가 있었는데 그 달 보름달에 왕위에 올랐는데 처음 나타냈다는 뜻으로 [[수로왕]] 혹은 수릉 이라고 했다.
== 역사 ==
=== 건국 ===
{{출처 필요 문단|날짜=2019-03-16}}
김해 일대는 장유면 등지에서 지석묘 등의 청동기유적이 발견되어 태고적부터 사람이 거주하고 있었다.
=== 전기 가야 연맹 ===
[[전기 가야 연맹]]은 [[42년]]부터 [[400년]], [[고구려]]의 [[
신라군은 [[물계자]]장군을 앞세워 이를 구원하였고 이후 전쟁은 포상팔국과 신라의 전쟁으로 비화되어 [[215년]]에 포상팔국 중에 3개국 연합함대의 울산 공격을 마지막으로 포상팔국의 패퇴로 끝나고 말았다. 포상팔국과의 전쟁에 신라의 지원을 받음으로서 가락국의 위신은 추락했고 가야 전체의 맹주자리도 위협당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이후 가락국의 해상무역은 다소 침체되기 시작했고 설상가상으로 [[백제]]가 [[고이왕]]대에서 [[근초고왕]]때에 걸쳐 [[백제]]가 중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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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시기에 탈해세력이 [[수로왕]]과 가락국을 놓고 경쟁하다 패하여 신라로 도망한 이래 [[탈해 이사금]]이 신라왕에 즉위하자 신라는 서기 [[79]]년경에 우시산국(于尸山國)과 거칠산국(居柒山國)을 합병해 낙동강 및 동부경남으로 진출을 개시함으로써 그 일대를 지배하고 있던 가야와 충돌을 빛기 시작한 것이다.
*[[77년]] 가을 8월에 가야는 [[탈해 이사금]]의 신라와 교전하였는데 [[신라]]의 [[아찬]] [[길문]](吉門)에 의해 [[황산진]](黃山津)<ref>지금의 경남 양산시 물금읍 물금리 황산역터 근처. 전덕재, 삼국시대 황산진과 가야진에 대한 고찰, 한국고대사연구 제47권, 2007년 9월, 35~75면 참고</ref> 어구에서 1천명의 가야군 전사자가 발생하였다.<ref>《[[삼국사기]]》<[[: s: 삼국사기/신라본기/제1권/탈해 이사금|신라본기 제1권 탈해 이사금 條]]></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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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한동안 가야와 신라의 전쟁은 소강상태를 유지했는데 [[102년]] 음력 8월, 파사왕이 진한제국의 맹주자격으로 [[음즙벌국]]과 [[실직곡국]] 사이의 영토 분쟁을 해결해줄 것을 요청받자, [[수로왕]](首露王)에게 이를 의뢰했고. 수로왕은 분쟁지역을 음즙벌국에 귀속되게 하였다. 그러나 그 후의 이를 축하하는 잔치에서 벌어진 사소한 사건이 살인사건으로 비화되자 이를 기화로 분쟁당사국을 침공해 합병한 파사왕은 [[106년]]에 가야를 침공해 파사왕 다음인 [[지마 이사금]]때인 [[115년]]~[[116년]]까지 전쟁이 벌어져 결국 신라의 패퇴로 끝났다.
*이후 [[포상팔국]] 전쟁에서 신라에 왕자를 볼모로 보낼만큼 빚을 진 가야는 신라와 직접 전쟁을 피하는 대신에 일본의 소국들을 매수하여 신라를 공격하게 했다. 일본의 소국들은 철 생산능력이 없어 가락국을 '쇠나라(須那羅)'라고 부를만큼 자국의 철 수요를 전적으로 가락국에 의존했고 가락국 및 가야는 철의 공급력을 이용해 일본의 소국들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는데 이를 이용해 신라를 공격한 것이다. 신라는 모든 것이 가야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이후 일본소국들의 공격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233년]] [[왜구]]가 신라의 서라벌을 포위했다가 천명이 전사한 것을 시작으로 [[유례 이사금]]대인 [[286년]]~[[295]]년에 수차의
*[[흘해 이사금]]대인 [[346년]]에 또다시 일본의 침공이 있었고 [[내물왕]]대인 [[364년]]과 [[393]]년에 두차례의 일본의 공격이 있었는데 이 두차례는 특히 가야의 신라침공을 위한 전초전이었다. 당시에 신라는 고구려와
=== 가야연맹의
[[399년]]에 가야의 [[철기군]]은 신라의 주요항구인 울산으로 북상을 시작했고 여기서 상륙해 있던
=== 가락국의 멸망 ===
금관가야(구야국)의 세력 약화로 고령에 위치했던 '''반파국'''이 [[대가야]]국이 가야의 맹주로 떠올랐다.
가락국의 왕손들은 이후 신라황실의 성(姓)인 김씨에 대해 신김씨라 불리며 명목상 진골에 편입되었지만 한동안은 신라의 상류사회로부터 차별이 있을수 있었다고
▲가야의 멸망에서 [[대가야]]에 이르기까지 가락국은 소국으로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다. 대가야의 후기에 들어서 대가야가 백제와 신라라는 양대 강국사이에서 쇠락의 길을 걷게 되자 가락국은 자주권을 잃고 신라의 보호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아직 대가야가 호남 동부를 차지하면서 극성하던 [[496년]]에 가락국은 신라에 화친의 표시로 "흰 꿩"을 보냈다. 이는 사실상 신속의 의미였다. 대가야의 다른 지역에서 고총(高塚)이라는 대규모 고분이 조성되고 있을 때 가락국은 그런 규모의 고분 조성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음이 확인될 정도로 가락국은 완전히 쇠퇴해 있었던 것이다. [[529년]] 신라장군 [[이사부]]는 가락국의 [[다대동|다다라]](多多羅)를 기지로 삼아 군사행동을 개시했다. [[임나일본부|안라왜신관]]에 소속되어 [[안라국]]의 명령으로 가락국의 자주독립을 지원하고 있던 [[오미노 케누]](近江毛野)의 일본군을 웅천(熊川)에서 공격한데 이어서 [[531년]]에는 구례모라(久禮牟羅)의 백제군을 패퇴시켰고 [[안라국]]을 중심으로 결집되어 있던 남가야는 산라와 백제 양쪽으로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그 와중에 532년 가락국왕인 [[구형왕]]은 결국 신라에 나라를 바쳐 투항함으로써<ref>《[[삼국사기]]》 〈[[:s:삼국사기/권34|권34]]〉 至十世仇亥王, 以梁中大通四年, 新羅法興王十九年, 率百姓來降,“10세(世) 구해왕에 이르러, 양 [[중대통]](남조 양(梁)의 무제(武帝)의 연호(529~534)이다.) 4년(신라 법흥왕 19년, 532년)에 백성들을 이끌고 와서 항복하였다. ”</ref> 가락국은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다. 구형왕과 그 후손들은 구 가락국의 영역을 발판삼아 진골로 편입되어 여전히 그 세력을 유지했고 이는 나중에 [[김유신]] 등의 후손들이 신라의 정계로 진출하는 기반이 되었다.
▲가락국의 왕손들은 이후 신라황실의 성(姓)인 김씨에 대해 신김씨라 불리며 명목상 진골에 편입되었지만 한동안은 신라의 상류사회로부터 차별이 있을수 있었다고 본다.하지만 삼국사기나 사서에 그런 증거는 없다.이런 신김씨의 위상이 높아졌던 것은 [[김유신]]이 나중에 [[태종무열왕]]이 되는 김춘추와 결혼동맹으로 제휴하면서부터로 이후 김유신은 김춘추를 왕위에 올리는데 노력하는 한편 삼국통일 전쟁에서 높은 전공을 세웠다. 그 자신도 생전의 전공으로 사후에 흥무대왕에 추증되어 신라왕이 되었다. 김유신의 손자인 [[김윤중]]은 당나라의 발해침공시와 때를 같이하여 북방의 말갈족을 평정하는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이런 신김씨의 위세가 몰락한 계기는 [[780년]] [[혜공왕]]이 [[대공의 난]](大恭之亂)중에 피살당하는 것으로 무열왕계가 끊기고 [[선덕왕]]의 [[내물왕]]계가 왕위를 잇게 되면서부터인데 무열왕계의 황실과 밀착하고 있던 신김씨는 무열왕계가 멸망하자 기댈 곳이 없어졌고 다른 진골귀족들로부터도 다시금 경원당하면서 심지어 6두품의 하급귀족으로 추락했다. 고려시대 이후 신 김씨는 본관을 김해로 지정받아 '''[[김해 김씨]]'''가 되었다. 가락국의 고토는 신라의 병합이후 금관군(金官郡)으로 편입되었고 [[680년]] 김유신의 조카인 [[문무왕]]에 의해 금관소경(金官小京)으로 승격하고 16년뒤에 [[김해경|김해소경]](金海小京)으로 개명해 지금의 [[김해]]라는 지명이 탄생했다. 문무왕은 가야왕실의 외손으로 [[김수로왕]]의 능역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기도 했다. 신라말이 되자 가야왕실의 후손인 [[김인광]](金仁匡)이 강력한 사병군단을 기반으로 지김해부진례성제군사명의장군(知金海府進禮城諸軍事明義將軍)을 칭하며 진례성(進禮城)을 중심으로 김해와 창원일대를 장악하였다. 김인광은 김해지역에 잔류해 있던 신김씨의 후손으로 봉림사의 건립을 후원하여 선종9산의 하나인 봉림산파(鳳林山派)의 후견인 구실을 하였다. [[906년]]에 김인광은 소충자(蘇忠子, 일명 蘇忠至)·소율희 형제에 축출당했고 이듬해에 충자가 사망하자 그 아우인 소율희가 김해부지군부사(金海府知軍府事)가 되어 김해, 창원및 함안지역을 다스렸다. 소율희는 나중에 자신의 성을 金씨로 고쳤고<ref>蘇자가 "쇠"를 가차한 것이라</ref> 관직명도 지진례성제군사(知進禮城諸軍事)로 개칭하고 김해 지방에 대한 지배력을 더욱 강화시켜 나갔다. 김인광, 김율희의 활약으로 고려시대에 김해지역이 역사상 "'''금관가야'''"로 인식되었다.
==지리==
오늘날, 경남 [[김해시]]인 이곳은 금관가야가 존재했을 당시에는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바다나 갯벌이었다. 일제강점기인 20세기 초 [[낙동강]] 제방공사로 인해 평야지대로 탈바꿈하였지만, 그 이전까지는 낙동강의 본류가 지금처럼 구포 방면으로 흐른 것이 아니라 선암다리 밑으로 흐르고 있었다. 부분적으로 수몰되지 않은 얕은 구릉에서는 어김없이 조개무지인 패총(貝塚)이 나오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ref>{{서적 인용 |제목= 유물로 읽는 우리 역사 | 저자= [[이덕일]] |연도= 1999 |출판사=세종서적 |쪽= 17~18 |id={{ISBN|8984070203}}|인용문= 오늘날 우리가 김해평야로 부르고 있는 이곳은 옛날 가락국이 존재했을 당시에는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바다나 갯벌이었다. 일제 시대인 20세기 초 낙동강 제방공사로 인해 평야지대로 탈바꿈하였지만, 그 이전까지는 낙동강의 본류가 지금처럼 구포 방면으로 흐른 것이 아니라 선암다리 밑으로 흐르고 있었다. 부분적으로 수몰되지 않은 얕은 구릉에서는 어김없이 조개무지인 패총(貝塚)이 나오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ref>
▲{{출처 필요 문단|날짜=2018-08-28}}
== 문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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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대 국왕 ==
금관가야는
#태조[[수로왕]] (<small>재위</small> [[42년]] ~ [[1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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