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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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뜻|대한제국||1897년 이후의 조선}}
{{조선 표}}
'''조선'''(朝鮮, {{중세 국어|됴션}}, {{문화어|리조조선, 리씨조선, 약칭: 리조<ref>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출판된 《백과전서》 제2권(과학, 백과사전출판사, 1983년) 547쪽에는 “리조조선”의 표제어로 등록되어 있으며 “당시의 나라이름은 조선이였으나 오늘의 조선 또는 고대국가인 고조선과 구별하기 위하여 그 왕실의 성을 따서 리조조선 또는 리씨조선이라고 부르며 이를 략칭하여 리조라고도 한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이 리조조선의 범위는 1392년부터 1910년까지이다.</ref>}}, [[1392년]]~[[1897년]])은 [[유학 사상|유학]]을 통치 이념 삼아 [[한반도]]를 505년 간 다스렸던 왕조이다. [[고려]] 말 [[신진 사대부]]의 지지를 등에 업어 무관 [[조선 태조|이성계]]가 건국하였고, [[조선대한제국 고종|고종]]이 선포한 [[대한제국]]으로 계승되었다.
 
추존된 임금 환조 [[조선 환조|환조 이자춘]]의 아들이자 고려왕조의 신흥 무인세력이었던 이성계는[[조선 태조|이성계]]는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군사정변]]을 일으켰다. 그는 [[창왕]]·[[공양왕]]을 제멋대로 왕위에 올렸다가 [[신돈]]의 사생아라고 사건을 조작하여 폐위하는 등 정권·군권·경제권을 쥐고 흔들었고, 전제 개혁을 단행했다. [[1392년]] 음력 7월 17일에는 [[공양왕]]이 왕대비에게 준 [[옥새]]를 이성계가 받아들어 주변 측근들의 추대로 왕위에 오르면서 조선왕조는 막을 올린다.<ref>[[#태조실록 1413|태조실록 (1413)]]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107017_001 1권, 태조 1년 7월 17일 병신년 1번째기사]; 《[[조선왕조실록]]》〈[[:s:태조강헌대왕실록/1년|조선왕조실록/태조실록/1년]]〉7월 17일, 태조가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하였다.</ref> [[1393년]] [[음력 2월 15일|2월 15일]]에는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였고,<ref>{{서적 인용|url=http://sillok.history.go.kr/id/kaa_10202015_001|제목=태조실록|성=|이름=|날짜=1393년(태조 2) 음력 2월 15일|권=3권|출판사=|장=국호를 조선으로 정하는 예부의 자문|확인날짜=2018-12-13|인용문='왕은 이르노라. 내가 덕이 적은 사람으로서 하늘의 아름다운 명령을 받아 나라를 처음 차지하게 되었다. 지난번에 중추원 사(中樞院使) 조임(趙琳)을 보내어 황제에게 주문(奏聞)하였더니, 회보(回報)하기를, ‘나라는 무슨 칭호로 고쳤는지 빨리 와서 보고하라.’ 하기에, 즉시 첨서중추원사 한상질(韓尙質)로 하여금 국호(國號)를 고칠 것을 청하였다. 홍무(洪武) 26년 2월 15일에 한상질이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가지고 왔는데, 그 자문에, ‘본부(本部)의 우시랑(右侍郞) 장지(張智) 등이 홍무(洪武) 25년 윤12월 초9일에 삼가 성지(聖旨)를 받들었는데, 그 조칙에, 「동이(東夷)의 국호(國號)에 다만 조선(朝鮮)의 칭호가 아름답고, 또 그것이 전래한 지가 오래 되었으니, 그 명칭을 근본하여 본받을 것이며, 하늘을 본받아 백성을 다스려서 후사(後嗣)를 영구히 번성하게 하라.」고 하였소.’ 하였다. 지금 내가 불선(不善)하니 어찌 감히 스스로 경하(慶賀)하겠는가? 실로 이것은 종사(宗社)와 백성의 한이 없는 복(福)이다. 진실로 중앙과 지방에 널리 알려서 그들과 함께 혁신(革新)하게 할 것이니, <ins>지금부터는 고려(高麗)란 나라 이름은 없애고 조선(朝鮮)의 국호를 좇아 쓰게 할 것이다.</ins>'}}</ref> [[1394년]]에는 [[한양]]을 도읍으로 하여<ref>{{서적 인용|url=http://sillok.history.go.kr/id/kaa_10310025_001|제목=태조실록|성=|이름=|날짜=1394년(태조 3) 음력 10월 25일|권=6권|출판사=|장=한양으로 서울을 옮기다|확인날짜=2018-12-13|인용문=한양으로 서울을 옮기었다. 각 관청의 관원 2명씩은 송경에 머물러 있게 하고, 문하 시랑찬성사 최영지(崔永沚)와 상의문하부사 우인열(禹仁烈) 등으로 분도평의사사(分都評議使司)를 삼았다.}}</ref> '재상 중심 정치'를 꿈꾸던 [[정도전]]을 중심으로 고려의 기존 제도를 아주 딴판으로 뜯어고쳤다.
 
형 [[조선 정종|정종]]을 꼭두각시로 세웠다가 곧 왕권을 양위받은 태조의 아들 [[조선 태종|태종 이방원]] 이방원은 특권층이 소유하고 있는 개인 사병들을 강제 해산, 조선군에 편입하고 [[호패법]]을 실시하는 등 왕권을 대폭 강화하였고, 정도전을 암살한 뒤 관료 제도를 재상 중심 [[의정부서사제]]에서 임금 중심인 [[육조직계제]]로 개편하였다. [[세종대왕]]은 1443년 [[집현전]]을 궁내에 설치하여 학문을 장려하고, [[장영실]]을 등용하여 아들 [[조선 문종|문종]]과 함께 [[과학]] 발전에도 힘썼으며, [[훈민정음]]을 창제하는 등 애민정치를 펼쳤다. 조카 [[조선 단종|단종]]을 [[계유정난]]으로 몰아낸 [[조선 세조|세조]]는 정통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세력을 제거한 뒤 태종처럼 육조직계제를 채택, 왕권을 강화하였고, 《[[동국통감]]》, 《국조보감》 등을 짓기도 했다. 단명한 [[조선 예종|예종]]에 뒤이어 즉위한 [[조선 성종|성종]]은 치국의 근본이 되는 《[[경국대전]]》을 편찬하는 등 문물 제도를 정비했다.
 
[[15세기]] 말부터 지방의 [[사림]] 세력이 정계에 등장하고 기존 대신인 훈구와 대립하면서 정치는 혼란해졌다. 사림과 훈구를 모두 배척하고 독단적으로 정치를 한 [[연산군]]을 [[중종반정]]으로 폐위하고 왕위에 오른 [[조선 중종|중종]]은 [[조광조]]를 중용하는 등 사림 공신에게 휘둘리지 않으려 애를 썼으나, 이렇다 할 치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조선 인종|인종]]과 [[조선 명종|명종]] 역시 사림과 훈구의 공방 속에서 요절했다. [[조선 선조|선조]] 대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훈구파가 정계에서 물러나고 사림파가 정계를 장악하게 되었다. 이후 사림이 붕당을 형성하여 대립각을 세우면서 조선 정치의 꽃 [[붕당정치]]가 탄생한다.
 
200년 간 평화로이 지내다가 [[16세기]]에 [[임진왜란]]을 겪은 조선은 국토가 쑥대밭이 되고, 재정이 바닥났으며, 백성이 도탄에 빠졌다.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펼친 [[광해군]]은 [[서인]]이 [[인조반정]]으로 왕좌에서 끌어내렸는데, 그로써 권력을 쥔 [[인조]]는 친명배금을 표방하다가 [[병자호란]]으로 탈탈 털린다. 이 양난을 기점으로 [[유교|유학]]의 영향력이 공고해지고, 조선의 역사는 후기로 접어든다. [[삼전도의 굴욕]]을 맛본 조정에서는 청나라에게 당한 수치를 씻자는 [[북벌론]]과 청나라를 본받자는 [[북학론]]이 대두되었으나 [[조선 효종|효종]]이 [[의료사고]]로 숨지면서 북벌론이 흐지부지되고, 북학론도 여전히 청나라를 오랑캐로 치부하는 관료들 때문에 국정에 반영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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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에서 가장 오랫동안 집권한 임금인 [[영조]]는 당쟁을 혁파하기 위하여 [[탕평책]]을 폈으나 붕당정치를 완전히 청산하지는 못했고, 오히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임오화변]]이 일어났다. 이때를 전후하여 [[천주교]]가 슬금슬금 자리를 잡는다. 조선의 마지막 개혁군주 [[조선 정조|정조]] 역시 [[탕평책]]을 폈을 뿐만아니라 [[정약용]]과 같은 [[실학]]자들을 발굴하여 [[수원 화성]]을 축성하는 등 개혁 정치를 시도했지만 1800년 갑작스럽게 사망한다. 1800 년대는 러일 전쟁이후 외세 세력들이 한반도에 출몰 하던 시기이고 실제로 서양 세력들이 인도네시아, 베트남, 인도, 필리핀, 싱가폴 , 중국 에게 마음대로 무력으로 들이댈 시기였다. 조선의 명성왕후 또한 러시아와 교류를 시도했다는 이유로 일본군이 갑자기 쳐들어와 명성왕후와 궁녀들을 수십번씩 긴 칼로 찌르고 가슴을 도려내며 죽은 시신위에 간음과 성폭행을 하고 불태워 우물에 버리는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다. 정조가 사망하면서 조선의 국운은 서서히 기울기 시작하고, 19세기 [[조선 순조|순조]]·[[조선 헌종|헌종]]·[[조선 철종|철종]] 3대에 걸쳐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등 외척 세력의 세도 정치가 60여 년 동안 계속되면서 나락으로 떨어진다. 이들 외척가문은 왕위 임명에도 손을 대는 등 부정부패 속에서의 절대권력을 누렸다. 그러던 가운데 흥선군 [[이하응]]이 풍양 조씨의 대표 [[신정왕후 (조선)|조대비]]와 결탁하여 둘째아들 명복을 조선 국왕 자리에 올리는데, 바로 [[조선 고종|고종]]이다.
 
[[흥선대원군|흥선군]]은흥선군은 [[흥선대원군]]이 되어 고종을 배후에서 조종, 붕당의 근원인 서원을 철폐하고 외척 가문인 안동 김씨 세력들을 손쉽게 축출하는 등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다. [[프랑스]]와 [[미국]]의 통상 강요와 협박에는 [[통상수교 거부정책]]으로 응수했다. 그러다 1873년 [[최익현]] 흥선대원군을 탄핵하여 고종이 친정을 하게 되는데, 실은 여전히 꼭두각시 신세를 면치 못했다. 다만 그 조종자가 흥선군이 아니라 부인 [[명성황후|민비]]였을 뿐이다.
 
민비는 민씨 일가를 국가 요직에 대거 임명하여 조정을 휘어잡은 뒤, 국가의 문을 활짝 열었다. 당시 조선은 물밀듯이 들어오는 서양 사상, 문물, 이양선의 홍수 속에서 혼란스러워 하며 러시아와 교류룰 시도하다 인간말종 이하의 일본군에게 시해를 당한다. 그때 20명 넘는 한국인 친일파들도 일본군과 동참했다. 조선을 손아귀에 넣으려고 [[일제]], 청나라, 서양 열강이 경쟁을 벌이는 가운데 조선의 운명은 그야말로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았다. 1882년에는 구식 군인들이 [[별기군]]과의 차별대우에 반발하여 들고 일어났고([[임오군란]]), 1884년에는 [[김옥균]] 등이 주도하여 개화정권을 수립했다가 삼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갑신정변]]). 1894년에는 농민 수탈에 저항하여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 한때 농민 자치를 실현했고, 이어서는 친일 성향이 짙은 [[갑오개혁]]이 발표되었다. 1895년에 일제가 친러파 민비를 암살하자([[을미사변]]) 위협을 느낀 고종은 1896년 몰래 [[아관파천]]을 감행하여 러시아 주한 공사관에 1년 동안 피신했다. 1897년 11월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이 경운궁의 편액을 [[덕수궁]]으로 고쳐 쓰고, 원구단과 환구단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함으로써 조선왕조 500년은 막을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