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라쿠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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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분제 철폐 이후의 부라쿠민 ==
 
[[메이지]] 신정부 수립 이후의 [[일본]]정부는 [[세금]]징수를 위해 부라쿠민 해방령을 공포하여 사농공상(무사, 농민, 공업인, 상인)의 신분제를 철폐하는 동시에 그때까지 '에타', '히닌'으로 불리고 있었던 천민 집단에 대해서도 일반국민(평민)의 지위를 부여하였다. 그러나 부라쿠민에 대한 일본사회의 뿌리깊은 차별의식 때문에 평민은 천민과평민과 동등한 지위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를 거부하여 해방령 반대 운동이 곳곳에서 벌어졌고, 이들에게 신평민(新平民)이란 호칭을 붙여 배척하였으며 해방령 이후에 천민은부라쿠민은 성난 일부 평민에게 습격을 당하기도 하였다.
 
[[파일:Flag of Buraku Liberation League.png|섬네일|200px|부라쿠해방동맹의 기.[[1922년]] 스이헤이샤 창설대회당시 제작됨]]
20세기 초 일본에서 시작된 [[사회주의]] 운동의 영향으로 부라쿠민들은 투쟁으로써 자신들의 평등하지 못한 현실을 바꿔야 한다는 [[진보]]적인 의식을 갖게 되었고, 차별이 없는 세상을 만들고자하는 조직적인 민중운동으로 발전하였다. 1922년 3월 3일 사이코 만키치(西光万吉), 사카모토 세키치로(阪本清一郎) 등이 중심이 된 스이헤이샤(水平社, 수평사)는 일본 최초의 인권 선언인 《스이헤이샤 선언》을 발표하는 등 부라쿠 차별 철폐 운동의 큰 구심점이 되었다. 스이헤이샤 창설대회 당시 부라쿠민들은 수평사 깃발에 피차별계급인 자신들의 아픔과 차별없는 세상을 만들려는 의지를 뜻하는 [[예수]]의 가시면류관을 그려넣었으며, [[죽창]]을 깃대로 사용하여 차별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투쟁의지를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결국 일본사회의 부라쿠민 차별은 없어지지 않아서 1923년 3월에는 '일본국수회'라는 [[우파]]단체와 나라현에서 유혈충돌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누군가가 부라쿠민을 [[차별]]하는 말을 한 사건이 발단이 되었는데, 국수회 회원이 [[일본도]]와 [[권총]]으로 스이헤이샤를 위협하면서 유혈충돌로 이어진 것이었다. 당시 [[일본군]]은 일본국수회와 차별발언을 한 사람에게 사건발단의 책임이 있음에도, 오히려 소란죄를 일으켰다며 스이헤이샤 관계자들을 검거하는 편파적인 모습을 보였다.<ref>《[[기독교사상]]》[[2003년]] [[1월]]호,'세계신학의 동향:구리바야시 데루오와 부라크민 신학/서창원/[[대한기독교서회]] p. 292, 295</ref>
 
[[식민지]] 지배 이후 [[조선]]에서 [[일본]]으로 유입된 [[재일 조선인]]은 아직 신분차별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유교]]적 신분 관념의 영향하에 있었기에, 부라쿠민을 조선의 천민-천민인 [[백정]]과 같이 생각하는, 그러니까 [[직업]]의 귀천을 따지는 직업관에 따라 천시하였고, 부라쿠민은 식민지인, 외국인이란 이유로 [[재일 한국인]]을 천시하였으나, 한편 양자 모두 일본 사회에서 [[차별]]과 멸시를 받는 위치에 있었기에 서로 협력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한국의 천민 계층에 대한 차별 의식은 [[일제 강점기]]로 전통적 신분 관념이 약화되고 [[한국전쟁]]이라는 대 혼란기를 거치면서 사라졌지만 일본에서는 지금도 봉건적 천민 차별 의식이 있다.
 
== 현대의 부라쿠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