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동맹: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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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족해방연맹’은 초기 동지획득, 자기완성, 조직준비 3가지 슬로건을 내걸고 활동을 개시했다. 일단 중앙에서 조직 핵심을 확보한 다음 지방조직과 하부조직을 결성하기 위해 각도 단위의 연락책임자 선정과 다양한 연락, 조직방식이 구사되었다. 조선민족해방연맹을 통한 1년간의 우여곡절과 준비작업 끝에 [[1944년]] [[8월 10일]] [[경성부]] 경운정 삼광한의원 현우현(玄又玄)의 집에서 '조선건국동맹'이 결성되었다. 발기인은 [[여운형]], 현우현, [[조동호]], [[김진우 (화가)|김진우]], 황운, 이석구 등으로 온건 사회주의자들 및 독립운동가 세력이 모여서 조직했다.(이 가운데 김진우는 구한말 의병장으로 활동했던 [[유인석 (1842년)|유인석]]의 문하생 제자였다.)
 
일부가 희생되어도 연쇄적 검거와 조직붕괴를 방지하기 위해 조직의 종적 연계를 방지하며,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제외한 민족적 양심가를 망라해 공장, 회사, 학교, 대중단체에 세포조직을 두기로 결정하였다. 건국동맹의 목적은 투쟁과 건설이라는 두 가지 점이었다. 첫째로 일제 패망 가속화, 둘째로 해방을 준비하기 위해 주체세력을 조직적으로 준비, 편성하는 작업이었다. 즉 민족해방투쟁과 건국준비사업을 위한 민족통일전선 결성이었다.
 
[[1943년]]~[[1944년]] 무렵 여운형은 조직의 명칭으로 '조선해방연맹','조선민족해방연맹','인민전선','인민위원회' 등을 구상하다가 건국동맹이라는 명칭을 확정하였다. 조선민족해방연맹,조선해방연맹이라는 명칭은 민족해방이라는 과제에 중점을 두었다. 이 명칭은 1930년대 후반~40년대 초반 공산주의자들이 많이 사용하던 조직명을 염두에 둔 것이며, [[1942년]] [[옌안]]에서 조직된 [[조선의용군|화북조선독립동맹]]과 일정한 통일성을 의식한 것이었다. 인민전선,인민위원회의 경우는 조직이 각계각층을 망라한 통일전선적 형태를 띤다는 점에서 강조점이 두어졌다. 인민전선의 구상은 [[1935년]] [[코민테른]] 제7차대회에서 결성된 '반파쇼인민전선','반제민족통일전선' 강조의 흐름과 일정한 연관성을 갖고 있었다. 인민위원회의 경우에는 정권형태 혹은 국가건설의 방향에 초점을 두었다. 인민전선이란 명칭은 반(反)파쇼,반제(反帝)세력을 투쟁전선으로 묶어낸다는 의미가 강했고, 인민위원회는 반면에 항일투쟁에 대한 강조를 담아낼 수 없었다. 조선건국동맹이라는 명칭은 민족해방투쟁보다는 해방 후 '건국준비사업'에 보다 강조점을 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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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
*각인 각파를 대동단결하여 거국일치로 일본제국주의제세력을 구축하고 조선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할 일.
*반추축(反樞軸) 제국(諸國)과 협력하여 대일연합전선을 형성하고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저해하는 일체 반동세력을 박멸할 일.
*건설부면(建說部面)에 있어서 일체 시위(施爲)를 [[민주주의]]적 원칙에 의거하고 특히 노농대중의 해방에 치중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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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항은 연합국과 반제연합전선을 형성해서 일제를 타도하고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국제적 지원을 받는다는 내용이다. 또한 일본[[제국주의]]자 뿐만 아니라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배제한다는 점이다.
 
세 번째 항은 국가건설문제를 다루었다. 이는 [[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시책을 [[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해 실시하고 그에 근거한 민주주의국가를 건설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건국동맹이 구상한 '인민적 민주주의' 국가는 '무산계급혁명'을 통해 수립될 [[사회주의]]적 국가와는 일정한 차이가 있었다.
 
건국동맹은 '3불'(三不)이라는 3원칙을 규약으로 채택하였다. 내용은 건국동맹에 대해 '일체 말하지 않는다'(不言), '문서로 남기지 않는다.'(不文),'이름을 말하지 않는다.'(不名)는 것이었다. 매우 간략한 이 3불원칙은 비합법단체로서 일제 탄압하에서 조직을 보존,보호하기 위한 강한 조직규율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조직성원이 준수해야 할 원칙으로 제출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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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성 직후부터 건국동맹은 중앙조직,지방조직을 꾸렸을 뿐만 아니라 각 계급,계층을 망라하기 위한 조직적 준비사업을 초보적인 단계에서나마 광범하게 진행시켰다. 광복 직전까지 조직은 급속히 확대되었지만, 강력한 조직역량을 갖추지 못한점이 한계였다. 건국동맹의 주요활동은 조직의 골격을 짜고 지방, 부문별 조직을 확대하는 조직활동, 해외혁명단체들과의 연락,연대활동, 건국준비 활동이었다.
 
[[1944년]] 8월에 참가한 [[여운형]], 현우현, 황운, 이석구, 김진우, [[조동호]]에 이어 [[1944년]] 10월에는 여운형의 추천으로 이기석, 최병철, [[김세용]], [[박승환]], [[김문갑]], [[이상백]], 허규, [[이만규]], [[이여성]], [[이수목]], [[정재철]] 등이 가맹했다. [[1944년]] 10월경에 작성된 중앙조직은, 위원장 [[여운형]], 내무부 [[조동호]],현우현(국내에서의 동지규합과 조직관리 활동), 외무부 [[이걸소]], 이석구, 황운(국외독립운동 단체와 연락 활동), 재무부 [[김진우 (화가)|김진우]], [[이수목]](자금조달과 관리 활동)이었다. 직업별로는 화가(김진우), 군인([[박승환]]), 한의사(현우현), 문필가([[김세용]], [[이여성]]), 체육인([[이상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참가했고, 이념적으로는 구한말 의병장 [[유인석 (1842년)|유인석]]을 시종했던 민족주의자(김진우)로부터 모스크바공산대학을 나온 공산주의자까지 폭넓은 층이 망라되었다. 건국동맹 중앙은 이념적으로 좌우의 폭넓은 단층을 포괄하면서 당면한 민족적 과제를 중심으로 조직된 것이었다. 대부분의 맹원들은 1920~1930년대 항일투쟁의 경험과 투옥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건국동맹 중앙은 [[여운형]] 개인의 영향력이 결정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조직원의 확보도 여운형의 개인적 관계에 의존하고 있었다. 참가한 인물들 역시 지사적 입장이 강한 중,장년층이 중심이었기 때문에 건국동맹의 중앙은 마치 우국지사들의 비밀결사의 형태에 가까웠다. 또한 참가 인물들이 조직적 훈련,활동을 벌인 사람들도 아니었고, 이념적으로 단결,통일되지도 않았다. 건국동맹은 이론적으로 탁월한 [[정치]]노선,조직노선이나 세련된 활동전술을 구사하지는 못했고, 개인적 연락활동에 치중하는 수공업적 조직화방식을 택하고 있었다. 그러나 1930년대 가장 열성적이었던 [[공산주의]]자들조차 [[경성콤그룹]](1939년~1941년 활동한 단체) 검거 이후 와해되어 [[일제강점기]] 말기 조직적 실체가 거의 전무하던 시대적 조건에서 건국동맹 중앙의 조직은 1940년대 국내 민족해방운동의 중요한 성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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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동맹===
먼저, [[농민동맹]]의 경우 [[1944년]] [[10월 8일]] [[경기도]] [[용문산 (경기)|용문산]]에서 조직되었고, 참가자는 [[여운형]], [[김용기]], 이장호, 최용근, 문의룡, 권중훈, 신재익, 최용순, 신홍진, 박성복, 주한점 등 13인이었다. 농민동맹은 조선해방을 목적으로 한 투쟁을 목표로 삼았고, 이를 위해 징용, 징병 방해, 민심 선동, 징용 및 징병자 도피, 공출반대를 벌였다. 실제로 농민동맹은 학병, 징용, 징병 해당 청년 수십 명을 [[용문산 (경기)|용문산]], [[예봉산]] 일대에 피신시켰고, 의사를 끼고 부정진단으로 징용, 징병을 면제시켜주거나 정신이상을 가장해 면제시키기도 하였다. 광복이후 조선청년총동맹 중앙위원이 된 [[전사옥]], [[이혁기]], [[염윤구]], [[국군준비대]] 부사령이 된 [[박승환]](당시 만주국 대위) 등이 대표적인 경우였다. 또한 공출반대를 위해 논농사를 짓지않고, 공출을 하지 않는 [[고구마]], [[감자]] 등 밭농사를 지어 식량으로 대체하였으며, 마을 내 재경중학교 학생들을 통해 [[경성부]] 시내 소학교직원과 전문학생 30여명을 규합한 후 이들로 하여금 민족의식 고취와 배일사상을 불어넣는 초보적인 선전선동활동을 벌였다. 농민동맹은 점차 그 활동범위가 확대되어 여주, [[양평]], [[이천]], [[경기도 광주시|광주]], 양주, [[홍천]], 고양, 경성 등지로 확대되었다. 농민동맹은 농민들이 주요 구성원이었지만 단순한 농민조직이라기 보다는 지하통일전선체로서 건국동맹의 근거지 역할을 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농민동맹은 농민들의 반일투쟁단체로서 뿐만 아니라 건국동맹의 일련의 조직, 선전, 군사활동을 위한 조직거점으로서 역할이 중요했던 것이다.
 
===학병·징병 거부자 세력과 연계===
두 번째로 학병,징용,징병 거부자 조직이 결성되었다. 건국동맹과 일정한 관련을 맺고 있던 대표적인 사례는 보광당(普光黨), 조선민족해방협동단,산악대(山岳隊) 등이다. 광복 직후 대표적인 학병거부자로 회자된 [[하준수]](일명 [[남도부]], 뒷날 빨치산 활동)가 있다. [[하준수]]는 학병기피를 위해 [[덕유산]]에 은신한 후 [[1945년]] 3월경에 징용거부자 73명을 모아 보광당을 조직했다. 보광당은 일제의 후방교란과 무장투쟁을 목적으로 주재소 습격과 군사훈련을 실시하다 광복을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