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천 조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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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임천조씨(林川趙氏) 시조(始祖) '''조천혁'''(趙天赫)의 본명은 조수강(趙守康)이고, [[북송 태조]] 조광윤(趙光胤)의 손자인 기왕(冀王) 조유길(趙惟吉)의 다섯째 아들이다아들이라고 한다. [[송나라]]에서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서두공봉관(西頭供奉官)이 되었으나, 979년([[송 태종]] 4)에 위왕(魏王)이 화를 입자 숙부 조유고(趙惟固)와 함께 난을 피해 [[고려]]에 도망쳐서 이름을 천혁(天赫)으로 고치고 임천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조천혁(趙天赫)은 [[고려 현종]] 때 [[강감찬]](姜邯贊) 장군과 함께 [[거란]]군(契丹軍)을 격파한 공으로 가림백(嘉林伯)에 봉해졌다봉해졌다고 한다.
 
임천 조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42명을 배출하였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LST_201_513_0503}}</ref>
 
== 인물 ==
* [[조지서]](趙之瑞, 1454년 ~ 1504년) : 11세손. 1474년(성종 5) 식년문과와 1479년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형조좌랑이 되었고, 건주위(建州衛) 정벌을 위하여 서정대장(西征大將) [[어유소]](魚有沼)의 종사관으로 참가했으나, 어유소의 파병(罷兵)과 관련된 전명(傳命)을 잘못하여 고신을 몰수당하고 외방에 유배되었다. 그 뒤 서반직에 복직된 뒤 교리·형조정랑·지평·응교 등을 지냈으며, 1495년(연산군 1) 창원부사로 파견되었다가 곧 사직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참살되었다. 성종 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 11세손 '''[[조지서]]'''는 [[조선 성종]](1474년) 때 문과에 급제하고 [[갑자사화]]에 연루되었다
* [[조정만]](趙正萬, 1656년 ~ 1739년) : 1681년(숙종 7)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735년 지돈녕부사·한성부판윤과 공조·형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저서로는 『오재집(寤齋集)』이 있다.
* [[조정만]]
* [[조명리]](趙明履, 1697년 ~ 1756년) : 1731년(영조 7)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여 도승지·이조참판·강원도관찰사·대사헌 등을 역임한 뒤 1755년 판윤이 되었다. 시호는 문헌(文憲).
* [[조명리]]
* [[조덕윤]](趙德潤, 1747년 ~ 1821년) : 1775년(영조 5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815년 병조판서에 올랐으며, 한성부판윤·우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효정(孝貞).
* [[조덕윤]]
* [[조부영]](趙富英, 1936년 ~ ) : 제13·14·16대 국회의원. 제16대 국회 부의장.
* [[조용필]](趙容弼, 1950년 ~ ) : 가수
* [[조배숙]](趙培淑, 1956년 ~ ) : 제16·17·18·20대 국회의원.
 
== 항렬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