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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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혁 ==
=== [[신라]] ===
* [[714년]] (성덕왕 13)에 [[당나라]] 조정에 들어갔던 김수충이 귀국하여 바친 [[공자]]와 10철, 72제자의 화상을 가지고 와서 국학에 안치시켰다.
 
=== [[고려]] ===
* [[983년]] (성종 2)에 박사 임노성이 송에서 돌아와 바친 <태묘당도>, <사직당도>와 그 기록, <문성왕묘도>, <제기도>, <72현찬기> 등 도서를 국자감에 안치했다.
* [[1020년]] (현종 11) [[최치원]]이 종사 되고, [[1022년]] (현종 13) [[설총]]이 종사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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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19년]] (충숙왕 6) [[안향|안유]]가 종사 되었다.
 
=== [[조선]] ===
* [[1407년]] (태종 7) [[한양]]에 현재의 [[성균관]] 문묘가 완성되어 [[대성전]]에 [[공자]]를 비롯한 4성<ref>4성: [[안자]], [[증자 (사상가)|증자]], [[자사]], [[맹자]]를 말한다.</ref>과 그 밑의 공문 10철<ref>공자 문하의 열 사람의 고제(高弟). 안회·민자건·염백우·중궁·재아·자공·염유·자로·자유·자하(子夏)를 말한다.</ref>을 배향함으로써 유학의 큰 도통(道通)이 정리 되었다.
* [[연산군]] 때에 문묘의 신판(神版)을 태평관으로 옮긴 뒤 그 안에 짐승을 기르는 등 한동안 문묘 기능을 상실했다가 [[중종반정]] 후 복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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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에 최종적으로 [[공자]]를 정위에 두고, 좌우에 4성·10철 및 중국 송대의 6현<ref>송나라 6현 : 주돈이, 정호, 정이, 소옹, 장재, 주희를 말한다.</ref>을 배향하고, 동무와 서무에 중국의 명현 94위와 우리나라 18현의 신위를 종사하였다.
 
=== [[현대]] ===
* [[1949년]] 광복 후 전국 유림 대회를 개최하여 [[공자]]를 비롯한 4성([[안자]]·[[증자 (사상가)|증자]]·[[자사]]·[[맹자]])과 송조 2현([[정호]]·[[주희]])을 제외한, 공문 십철과 동·서 양무에 중국 유현 94위를 매안하고, 동·서 양무에 봉안하고 있던 [[동방 18현]]을 [[대성전]]에 승봉키로 결의하고 전국 향교에도 시행하도록 하였으나, 이 개혁안에 대해 보수 유림들의 반발로 일제히 시행되지 못하였다.
* [[1961년]] 2월 23일 전국 유림대회를 다시 개최하여 매안한 공문 십철과 송조 4현을 복위키로 결의하여, 현재 [[성균관]]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한 [[안자]]·[[증자 (사상가)|증자]]·[[자사]]·[[맹자]] 4대 성인과 [[공자]]의 뛰어난 제자들인 [[공문십철]] 및 송조 6현([[주돈이]]·[[정호]]·[[정이 (학자)|정이]]·[[소옹]]·[[장재]]·[[주희]])과 우리나라 [[동방 18현|18현인]]의 위패를 봉향하였다.